[@뉴스룸/민동용]‘트럼프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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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용 정치부 차장
민동용 정치부 차장
 지난달 27일 오전 미국 대선 1차 TV토론이 끝난 직후, 생방송으로 다 봤다는 더불어민주당의 30대 초반 남성 당직자에게 “누가 이긴 것 같아?”라고 물었다. 이 당직자는 “트럼프가 이긴 것 같은데요. 힐러리를 상대로 말끝마다 후크(hook·반복되는 짧은 후렴구)를 던진 게 재미있네요”라고 말했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곤경에 빠뜨린 ‘e메일 게이트’를 가지고 거듭 공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날 미국 주요 언론에서는 힐러리가 우세했다고 평가했다. 국내 언론도 모두 힐러리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 외신기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트럼프 우세가 많았다”고 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중하층 백인 유권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는 해석이 곁들여졌다.

 열흘 뒤, 트럼프의 11년 전 음담패설 동영상이 공개되자 그에게 온갖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미국 언론 할 것 없이 “사실상 대선은 끝났다” “낙마 위기”라고 보도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롯해 상·하원 의원 등 공화당 주요 정치인 150명 이상이 트럼프 지지를 철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0일 열린 2차 TV토론이 끝난 뒤 더민주당의 같은 당직자에게 소감을 물어봤다. 이 당직자는 “트럼프가 ‘힐러리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정말 끈질기게 하네요”라며 씩 웃었다. 1차 TV토론 때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트럼프가 못하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2차 TV토론 이후 오히려 트럼프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올랐다고 한다. 미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를 보려고 몇 시간 전부터 유세장 주변에 장사진을 친 지지자들을 보도했다. 주로 백인인 이들은 트럼프의 외설적 여성 비하 발언 스캔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트럼프빠(트럼프 극렬 지지층)’들이었다.

 한 달가량 남은 미 대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트럼프 현상’을 보면서 4·13총선이 기억났다. 당시 기자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은 새누리당의 압승을 예상했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바다. 이른바 우리나라 주류 언론과 주류 사회는 밑바닥에서 도도히 흐르던 민심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다. 기존 정치에 대한 반감의 깊이와 변화에 대한 열망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미 공화당 엘리트들이 트럼프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보수층이 대거 이탈했다고 본다면 이는 4·13총선 때 우리 주류 사회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셈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때도 노동당과 보수당, 언론의 예측은 대부분 틀렸다. 서민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힐러리빠’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트럼프빠가 줄어들었다는 외신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하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대선에 미칠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민동용 정치부 차장 mindy@donga.com
#미국 대선 1차 tv토론#트럼프#힐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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