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칼럼]지식인인가, 난적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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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외면한 좌파에게 앙드레 지드가 말했다 “지식인은 둥지를 틀지 않는다”
‘둥지’를 튼 진영이 집권하면 권력의 단맛 떨치지 못해… 있는 문제도 눈감거나 사실 왜곡
지식인으로서 자존심 없으면 나라 어지럽히는 도적일 뿐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장면 하나를 소개하자. 퇴임 후 사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두꺼운 논문집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정치 발전에 관한 학술회의 자료라는데….”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는 말. “대통령까지 했으니 우리 정치에 대한 고민이 좀 많겠어요? 뭐가 있을까 해서 읽었는데 질문도 답도 없어요. 두껍긴 이렇게 두꺼운데….”

이어 던지는 질문. “내가 잘못된 겁니까, 아니면 학문이란 게 원래 이런 겁니까?” 낮은 적실성(relevance)의 문제, 즉 학문이다 뭐다 해 봐야, 또 학자니 지식인이니 해 봐야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부끄러웠다. 명색이 공부를 직업으로 해 왔던 사람이라.

장면 하나를 더 소개하자. 선배 학자 한 분과 마주한 점심 자리, 그가 앙드레 지드의 이야기를 되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였던 지드, 하지만 막심 고리키를 문병하기 위해 갔다가 소련을 보고 크게 실망한 후 이를 ‘소련 방문기’로 엮어 낸다. 좌파 지식인들이 그의 ‘변절’을 비난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자 그는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을 공산주의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은 둥지를 틀지 않는다.”

그 선배의 메시지는 그랬다. ‘당신은 그런 둥지를 틀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아니었다.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둥지를 틀기도 하고, 또 둥지 틀 곳을 찾기도 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자책일까? 이 두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저급한 정책담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학문이란 게 이런 거냐고 묻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식인들이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묻고 짚어야 할 것을 제대로 짚어왔다면 우리의 담론 수준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담론 수준은 바닥이다. 일례로 개헌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예전 같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헌을 하자면 당연히 이와 관련된 것들, 즉 새로운 시대에 있어 국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며, 또 시장 및 공동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의식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대부분의 지식인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따위의 정치권이 던져 놓은 질문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설령 이 문제가 개헌 문제의 핵심이라 하더라도 문제의식은 좀 더 크고 넓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이 문제뿐이겠나. 교육문제, 산업구조 조정의 문제 등 거의 모든 문제가 그렇다.

시대정신과 문제의식이 사라진 정치와 정책과정에서는 힘과 스타일이 판을 친다. 힘이 있으면 먹고 힘이 없으면 밀리고, 어떤 행동으로 어떻게 보이느냐의 스타일 문제가 무슨 문제를 얼마나 잘 푸느냐의 실질(substance)의 문제를 앞서 간다. 이 살벌하고도 허무한 세상에 대해 지식인들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둥지’를 트는 현상은 더욱 심하다. 적지 않은 지식인이 진영논리에 빠져 일방적 ‘편들기’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내로남불’의 논리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을 서기도 한다.

지난 인사청문회 때를 기억해 보라. 허위 혼인신고, 논문 표절, 음주운전, 탈세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 입을 닫았다. 일부는 ‘로맨스’라 강변하기도 했다. 그들이 욕하던 보수적 지식인들이 지난 정부 때 했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차라리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임명해야 하는 논리를 만들기라도 하지, 어떻게 있는 문제에 눈을 감거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나.

우리와 같이 진영논리가 강한 사회에 있어서의 ‘둥지’는 단순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둥지’를 튼 진영이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의 조각이라도 구경할 수 있고, 그 진영에 속한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쉽게 떨칠 수 없는 달콤함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되겠나.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거울을 본다. 나는 어떤 모습인가? 새로운 시대정신과 문제의식으로 물어야 할 것을 묻는 지식인의 모습인가. 아니면 진영논리 속에서 ‘내로남불’의 의미 없는 편들기나 하는 난적(亂賊), 즉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나 도둑’의 모습인가?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bjkim36@daum.net
#노무현#담론 수준#지식인#인사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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