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폭언’에 93%가 직업병 앓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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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의 하루

《 오늘도 그녀는 낯모르는 이에게 전화를 건다. 고객은 왕이요, 고객의 낮은 평점은 사약이다. 얼굴 없는 ‘갑’에게 시달리는 그녀는 콜센터 상담원이다. 2007년 3만7800명이던 전화 상담원은 2011년 6만3500명으로 68% 늘었다. ‘얼굴 없는 폭언’의 피해자. 취재팀은 현장 상담원들과의 인터뷰와 지난해 9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콜센터 상담원 노동 과정과 실태’ 연구자료를 토대로 ○○홈쇼핑 고객지원1팀 박인영(가명) 씨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

눈을 떴다. 어제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던 아저씨가 꿈에 나왔다. “××, 똑바로 하란 말이야!” 막말을 퍼붓던 얼굴은 꿈에서도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다시 지끈지끈 아파 왔다. 병원에 들렀다 출근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박 씨는 홈쇼핑 회사 내 콜센터에서 ‘인바운드(Inbound)’ 업무를 맡고 있다. 콜센터 업무는 형태별로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Outbound)’ 업무로 나뉜다. 인바운드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이다. 고객의 주문 접수와 문의 상담, 불만 사항 처리, 사후서비스(AS) 접수 등이 주를 이룬다. 아웃바운드는 전화를 거는 업무를 말한다. 시장조사, 소비자 의식조사, 이벤트 행사 안내, 전화 판매 등을 포함한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가 지난번 뇌 검사 때 찍었던 자기공명영상(MRI) 결과물을 보고 있다. 전화를 받다 보면 머리 한쪽이 깨질 듯이 아파 검사를 받았다. “이상은 없네요. 심인성(心因性)입니다. 약은 처방해 드릴 텐데 스트레스 조절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막말 고객에게 “약을 먹고 있다”고 하소연할 순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여성 텔레마케터 559명 중 93.2%가 “콜센터 업무와 관련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답했다. 유형은 호흡기질환(54%)이 가장 많았고, 두통(44%), 시력 약화(37%), 귓병(33%)이 뒤를 이었다. 직업병의 원인으로는 ‘고객 응대 스트레스(66%)’가 가장 많이 꼽혔다.

업무 시작 30분 전.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쳐진 고객지원1팀에는 상담원 50명이 빼곡히 앉는다. 문 앞에 놓인 생수병 묶음에서 한 병을 뽑아 자리에 내려놓는다. 벌써부터 목이 칼칼한 느낌이다.

대체로 인바운드는 24시간 5교대제로 운영되며 아웃바운드는 8시간 통상근무로 운영된다. 홈쇼핑 인바운드의 경우 교대근무 형태로 ‘24시간 대기’로 전화를 받는다. 한 인터넷 쇼핑몰 상담원은 “하루 종일 통화를 하다 보면 마른기침이 쉴 새 없이 나온다. 안 마시던 커피도 하루 네다섯 잔씩은 마시게 된다”고 말했다.

“아, 미친 ×이 말귀 ×나 못 알아먹네. 이딴 걸 팔아먹어 놓고 나보고 갖다 달라고?” 쇳소리가 날아와 박힌다. 가방 지퍼가 뻑뻑하다며 당장 새 걸로 바꿔 달라는 고객이다. 모니터에 ‘민원팀 관리 요청’ 등급이라는 표시가 뜬다. 이전에 3차례 이상 난동을 부렸다는 의미다. “내일 오전까지 직속 담당자에게 전화를 드리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무마한다. 잠시 헤드셋을 벗으니 록 콘서트라도 갔다 온 듯 멍하다.

114 콜센터와 각종 홈쇼핑, 백화점 콜센터 등에는 대부분 ‘막말왕’ 전담팀이 따로 있다. ‘관심 고객’, ‘응대 주의’ 등 이들에게 붙여진 ‘코드명’은 다르지만, 1차 콜센터에서 걸러져 2차 부서에서 아웃바운드 형식으로 관리된다는 점에선 같다.

업무시간에 밤이 포함된 교대 조는 기피 대상이다. 홈쇼핑 채널에 ‘속옷 광고’가 시작되기 때문. “저거 뒤태가 보고 싶은데” “나는 남잔데, 저 브래지어 내가 입으면 어떨 것 같아?” 헤드셋을 쓴 뒷목에 소름이 돋는다. 이쯤 되면 주문 전화가 아니란 걸 알지만 바로 끊을 수조차 없다.

인권위의 2009년 여성 텔레마케터 조사 결과 응답자의 36.7%가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고객에 의한 성희롱’이 77.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회사 측에서 성희롱 예방 조치를 실시하는 경우는 55.3%로 나타났다.

161콜, 오늘의 실적. 평소보다 10통은 더 받았다. 민원팀 김모 대리에게 낮의 ‘지퍼 손님’ 아웃바운드 요청 e메일을 쓴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블랙리스트 하나하나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 김 대리를 떠올리니 씁쓸해진다.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오늘은 꿈에서 욕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해 한 은행 콜센터의 경우 1일 평균 상담원의 통화 건수가 평균 150건 내외였다. 서울시 다산콜센터 상담원은 평균 130∼140건을 기록했다. 하루 종일 얼굴 없는 상대와 대화하는 콜센터 상담원은 ‘감정 소진’ 현상이 심각한 대표적 감정노동직 중 하나다. 이 중 80%는 여성이고, 평균적으로 4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둔다. 한 8년 차 백화점 상담원은 인터뷰를 마치며 “우리도 고객처럼 똑같은 사람이고, 자신의 말을 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최소한 우리에게도 충분히 설명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하종대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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