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위기에 동맹 근간 FTA 흔드는 트럼프… 참모들도 반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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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한미 FTA 폐기 준비 지시]재협상 요구에 한국 소극적이자
초강수 카드 일방적으로 꺼내
美언론 “한국 압박용일 수도”

측근들 “안보협력 해칠 우려”
美상의 “폐기땐 백악관과 관계악화”

한국 정부 “여러 가능성에 대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앙’이라 불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 수위가 ‘재협상(Renegotiation)’에서 ‘폐기(Withdrawal)’로 한 단계 올라갔다.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방적으로 재협상을 선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또다시 한국의 예상을 뒤엎고 초강수를 둔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소비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한미 FTA마저 폐기되면 한국 경제 회복이 더 미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단 정부 안팎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한미 FTA 개정 또는 재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협상용 발언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이뤄져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시점인 만큼 동맹 관계인 한국와 미국이 경제 문제를 놓고 대립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 협상용 발언 가능성…미국 내 반대 목소리도 커

청와대에 따르면 1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기로 한 전화 통화에서 한미 FTA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3일 전해졌다. 두 정상의 통화 후 불과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를 언급하자 정부는 당혹감 속에 진의 파악에 나선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 모두 한미 FTA가 폐기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양국 제품에 모두 관세가 붙을 경우 한국 공산품은 중국 일본 등에서 생산한 제품보다, 미국산 농산물 등은 호주 유럽연합(EU)에서 생산된 것보다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농축산물의 한국시장 진입 장벽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억 달러가량의 쇠고기를 한국에 수출한 미국의 농축산 업계가 한미 FTA 폐기 발언에 크게 반발했던 이유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한국은 미국 시장에서 교역 규모 6위로, 한미 FTA가 폐기되면 미국이 받을 충격도 크다. 재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백악관 선임 경제학자로 일했던 채드 본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미 FTA가 사라지면 한국이 미국산 제품 및 농산물에 평균 14%의 관세를 물려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서 구매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많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를 고려하는 건지, 협상의 기술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건지는 불분명하다”고 분석했다. 다만 승부사 기질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미 무역대표부(USTR)를 통한 공식 답변 대신 직접적으로 폐기를 언급하며 국면 전환을 노렸다는 지적도 있다. 공동 조사를 먼저 하자며 버티는 한국을 개정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양국은 지난달 22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개최했으나 개정이나 재협상 등 트럼프 대통령이 기대하는 결과를 도출하지 않았다.

○ 한미 관계 악화될 것 우려

한국 정부는 일단 미국의 공식 발언을 기다리겠다는 방침이다. 통상교섭본부 측은 “미국에서도 폐기를 위한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단 공동 조사를 미국에 제안한 만큼 여러 가능성을 놓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비롯한 백악관 경제 참모들이 협정 폐기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상공회의소도 “한미 FTA를 폐기하면 백악관과 업계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미 FTA 협정문에 따르면 FTA를 폐기하려면 한 국가(미국)가 상대국(한국)에 서면으로 FTA 종료 의사를 통보하도록 규정돼 있다. 만약 한국이 30일 안에 협의를 요청하면 미국은 요청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협상에 응해야 한다. 한국이 협의를 요청하지 않으면 FTA는 180일 후 자동 폐기된다. 미국의 경우 FTA 폐기를 위한 의회 동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70년대 미국 의회는 대통령에게 FTA 폐기 권한을 넘겼다. 굳이 의회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국회 승인이 필요하다는 별도 규정이 없다.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전례가 없어서 어떤 절차로 폐기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약 미국이 공식적으로 한미 FTA 종료 요청을 하면 한국 정부는 미국에 협상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큰 불만인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감소 추이에 있다는 것을 적극 설명할 필요도 있다. 이날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미국은 대(對)한국 상품무역에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9% 줄어든 112억390만 달러(약 12조5483억 원) 적자를 봤다.

이날 북한이 6차 핵실험을 전격 시행하는 등 미국과 긴밀한 안보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도 변수로 지목되고 있다. 양국이 FTA를 두고 갈등을 키우다 보면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서다. WP는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협정 폐기 움직임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이 강해지는 시점에서 한국을 고립시킬 수 없다는 고민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 워싱턴=박정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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