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줄 테니 난민 받아줘”… 저개발국에 난민 떠넘기는 유럽[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30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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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이민자 대책 골몰하는 유럽
英-伊, 자국 내 난민 제3국 보내고… 튀니지 등은 난민 유럽행 차단
단속 강화로 난민 피해 속출… 노숙 장기화, 실종-죽음 빈번
“국경 관리의 외주화” 흐름 속 인권 탄압-국제법 위반 논란

21일(현지 시간) 오후 이집트 카이로 외곽 마디나 시타 욱토베르시에서 수단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유엔난민기구(UNHCR) 본부 
주변에 주저앉아 있다.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이들은 마땅한 거처가 없다 보니 주로 거리에서 생활한다. 마디나시타욱토베르=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21일(현지 시간) 오후 이집트 카이로 외곽 마디나 시타 욱토베르시에서 수단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유엔난민기구(UNHCR) 본부 주변에 주저앉아 있다.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이들은 마땅한 거처가 없다 보니 주로 거리에서 생활한다. 마디나시타욱토베르=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아프리카인들은 거지가 아닙니다.”

1월 2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던 이탈리아·아프리카 정상회담. 아프리카연합(AU) 45개국 정상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무사 파키 AU 집행위원장은 개최국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에게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선 (불법 이민자 지원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파키 위원장이 공개석상에서 과격한 언사를 쓴 건 이유가 있었다. 멜로니 총리가 “교육, 보건 등 분야에 55억 유로(약 8조145억 원)를 투자하는 대가로, 유럽으로 오는 불법 이민자들을 아프리카 정부가 억제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입장에선 ‘돈 줄 테니 알아서 불법 이민자를 막으라’는 요구에 날카롭게 응수한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프리카로선 쉽게 거절할 처지가 아니란 게 문제다. 다수 국가들이 경제난으로 신음하고 있어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현지에선 울며 겨자 먹기지만 유럽 지원을 받아들일 거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유럽도 할 말은 있다. 불법 이민자 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골칫거리다. 유럽연합망명청(EUAA)에 따르면 지난해 망명 신청 건수가 114만 건에 육박해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경 경비 강화나 단속으론 한계가 있어, 현금성 지원을 통해 불법 이민자 수용 ‘아웃소싱’(외주화)을 추진하는 것이다.

유럽이 내세운 취지는 나쁘지 않다. 지원국의 경제 성장을 도와 불법 이민의 근본 원인을 없애고, 밀입국 등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는 참사를 줄이자는 것. 하지만 벌써부터 불법 이민자들을 돈 주고 떠넘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아프리카가 불법 이민자들을 위해 돈을 쓸지도 의문이다. 유엔 인권감시기구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유럽연합(EU)이 이집트에 불법 이민자 관련 74억 유로(약 11조 원)을 지원하기로 하자 “현금 지원은 권위주의 정부의 인권 학대를 외면하는, EU 가치에 어긋난 행위”라고 지적했다.

● EU, 북아프리카 돈 주고 단속 지원

EU의 불법 이민자 아웃소싱은 주로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대상이다. 유럽과 물리적으로 가까워 불법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오는 중간 기착지로 삼는 나라들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이탈리아·그리스·키프로스 정상으로 구성된 EU 대표단은 1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만나 무역, 안보 등 분야에서 재정 협력을 강화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EU가 3년간 지원할 금융패키지 74억 유로에는 보조금 항목으로 불법 이민자 대응 명목의 2억 유로가 포함돼 있다.

이집트엔 수단, 시리아 등 내전 중인 주변 아프리카와 중동 불법 이민자들이 수십 년 동안 유입됐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3월 기준 이집트 불법 이민자는 약 55만 명으로 추산된다. 최근 이집트 경제난이 심화되며 이들은 더욱 유럽으로 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북부 해안 경비를 강화해 왔다. 그러자 요즘엔 이집트에서 치안이 불안정한 리비아로 간 뒤에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는 불법 이민자들이 풍선 효과처럼 늘고 있다.

이탈리아 람페두사섬에서 180km 떨어진 튀니지 북부 해안도 불법 이민자들의 주요 통로다. 지난해에만 람페두사섬으로 14만5000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이에 지난해 7월 EU는 국경 관리 및 단속 강화를 대가로 튀니지 정부에 약 10억 유로를 제공하는 협약을 맺었다. 당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번 협약이 북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비슷한 협정을 맺는 데 선례가 될 것”이라 평했다.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로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도 크게 늘고 있다. 이전엔 모로코에서 스페인 본토로 가는 루트가 성행했지만, 해안 경계가 강화되자 본토에서 약 1500km 떨어진 섬으로 우회를 시도하는 것이다. AP통신은 “지난해 카나리아제도로 들어온 불법 이민자는 2006년 이후 최고치인 3만2029명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카나리아제도는 최근 멀리 떨어진 세네갈에서 밀항을 시도하는 불법 이민자도 많아졌다. 이들이 택한 ‘대서양 루트’는 지중해를 건너는 것보다 훨씬 거리가 멀어 난파할 위험도 훨씬 크다.

● 고향 떠났지만 또 다른 사지로…

경제적 지원을 받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실제로 국경 단속을 강화하는 추세다. 하지만 문제는 밀입국 통로만 막았을 뿐, 불법 이민자들의 처우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인권탄압이나 실종 사례가 빈번하게 보고되며, 살길을 찾아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난 이들이 또 다른 사지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비영리기관 ‘이집트 난민 플랫폼(RPE)’은 “지난달 이집트 UNHCR 센터 앞에서 이집트 보안요원들이 수단 출신 불법 이민자 가족들을 ‘노예’라 부르며 괴롭혔다”고 폭로했다. 이밖에도 불법 이민자를 대상으로 폭력이나 괴롭힘 등이 빈번한 것으로 전해졌다.

21일 오후 찾아간 UNHCR 센터 주변은 실제로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불법 이민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마 씨(47)는 “마땅히 갈 곳도, 생계 수단도 없다”며 “심사를 받으려면 수시로 서류를 제출하고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해 아예 인근에서 머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밤이 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나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구걸을 하기도 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이집트 국민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한 인근 식당 주인은 “내전을 피해 탈출해 비교적 부유할 거란 선입견이 있지만, 대부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전했다. 반면 주민 헤가지 씨(35)는 “노숙자들이 늘어나니 동네 분위기가 나빠져 아무래도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는 불법 이민자들도 적지 않다. 국제이주기구(IOM)는 22일 “리비아 남서부에서 불법 이민자로 추정되는 시신 약 65구가 묻힌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며 “사막 지역을 거쳐 밀입국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엔 리비아 사막에서 어린이와 여성이 포함된 불법 이민자들이 식수도 없이 죽어가다 가까스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들은 나이지리아 출신들로 튀니지 국경수비대에 발각된 뒤 안전 조치도 없이 국경 밖 사막지대로 쫓겨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IOM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 3월 20일까지 지중해에서 실종되거나 숨진 불법 이민자들은 2만9296명에 이른다. 올해 들어서만 밀항선이 좌초되며 442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 아프리카에서 실종되거나 사망한 이들도 205명에 이른다. 이는 확인된 숫자일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英 ‘르완다 모델’, 유럽으로 퍼지나

불법 이민자로 몸살을 앓고 있는 EU는 최근 영국식 ‘르완다 모델’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의 간판 정책으로 꼽히는 르완다 모델은 쉽게 말해 르완다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영국에 온 불법 이민자를 보내는 방식이다. 현재 영국에선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위법으로 판결했으나, 의회에서 ‘살짝 재수정한’ 법안을 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럽의회 제1당이자 중도 우파 성향인 유럽국민당(EPP)은 6월 선거 공약에 ‘이주민을 안전한 제3국으로 보내기 위해 역외 국가들과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현지에선 르완다 모델을 벤치마킹한 공약이란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해당 모델은 영국에서도 반(反)인권적이란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다, 유럽인권재판소가 올 1월 해당 법안의 위법성을 지적해 추진이 쉽지 않다. 불법 이민지가 가야 하는 국가가 ‘안전하지 않다’면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이다.

수낵 총리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르완다 모델을 계속해서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하지만 야당인 노동당이 반대 방침을 견지하는 데다, 여당인 보수당 일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진행이 쉽지 않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수낵 정부는 르완다로 가는 첫 비행기를 봄까지는 띄우겠다는 구상이지만, 계획에 차질을 빚으면 6월 이후로 연기될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 감사원(NAO) 보고서에 따르면 르완다 모델이 시행되면 영국은 불법 이민자 1명당 약 17만1000파운드를 르완다에 지불해야 한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난민#저개발국#eu#불법 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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