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탈출 한국인 가족 “옷만 챙겨 피란, 캔음식 연명…국경 6번 오간 끝에 극적탈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3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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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폭격의 강도, 예전과는 달랐다
23일간 400km 피란길...집도 폭격에 무너져
친척-지인 남겨두고 우리만 탈출해 죄책감도
정부가 구하러 올거라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2일(현지 시간) 늦은 저녁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에는 일가족 5명을 태운 승합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여느 단란한 가족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은 이날 오전에 처절한 생사의 문턱을 넘었고, 비로소 전쟁이 없는 땅에 도착했으며, 차량으로 약 400km를 달리고 나서야 고국의 안전한 손길이 닿는 곳에 도착했다. 폭격을 피해 피란길에 나선 지 약 23일만, 국경을 넘어 이동한 지 약 9시간 만이다. 이들이 타고 온 차량 뒷 칸엔 20여일 간 생존을 위해 메고, 끌고 다녔던 무거운 트렁크와 쫓기듯 들고 나온 짐들이 한가득이다.

지난달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봉쇄된 가자지구에 26일가량 갇혀있던 유일한 한국 교민 일가족 5명이 무사히 이집트 국경으로 빠져나와 구출됐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동아일보와 만난 이들은 대사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힘겹게 미소지으며 “국경에 마중 나온 한국 대사관 분들을 봤을 땐 부모님을 본 것처럼 눈물 나게 반가웠다”며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가 올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동시에 “시댁 식구들, 친척, 지인들을 가자지구 폭격 속에 남겨두고 저희 가족만 나온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며 죄책감과 미안함도 토로했다.

● 탈출 명단 포함됐어도 혹여 틀어질까 조바심
중동전쟁 발발 후 전쟁 당사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도주의적 구호 방안으로 가자지구 내 외국인과 이중국적자를 이집트와 맞닿은 라파 국경 검문소를 통해 우선 탈출시키는 방안에 합의했다. 앞서 1일에 1차로 일부 외국인들이 탈출했으며 이날 2차로 한국 국적자들도 탈출 명단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가족 중 대표로 인터뷰에 응한 어머니인 최모 씨(44)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면서도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몰라 마음을 계속 졸였다”며 “혹시나 절차가 지연되면 현지에서 내일(3일)부터 주말이라 업무가 종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고 했다. 국경 검문소에서 신원 확인 및 짐 수색 절차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전쟁 중이니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시도 맘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대사관 관계자는 “전 세계 외교가가 분주하게 자국민 탈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탈출 가능한 외국인 명단이 어떤 기준으로 발표되는지 어느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며 “당국이 수시로 이집트, 이스라엘 측과 조율하며 읍소했던 게 다행히 통한 것 같다”고 전했다.

● 대피령으로 시작된 23일 간의 피난길
지난달 7일 전쟁 발발 이후 매일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격의 공포를 버티던 이들은 전쟁 3일 만인 10일 피난을 결심했다. 최 씨는 “7년째 가자지구에 살았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폭격의 강도가 전쟁 초기부터 달랐다”며 “게다가 이스라엘군이 ‘대피하지 않으면 당신들 책임’이라는 식으로 대피령까지 내렸는데 도대체 언제 폭격을 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불안감에 온 가족이 겨울용 옷가지만 급하게 챙겨 짐을 쌌다”고 했다.

불과 2년 전에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였고 ‘세계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충돌이 잦은 곳이기에 일찍 전쟁이 끝나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들려오는 지인, 친척들의 사망 소식과 무너지는 건물들을 보며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이전엔 주거지역 폭격은 흔치 않았거든요. 게다가 학교, 병원, 교회 등 저희 이웃들이 생활하던 모든 곳이 무너지니까 정말 참혹했어요.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은신처, 터널이 이런 건물들 아래 있다고 폭격하는데 저희들이 지하에 뭐가 있는지 도대체 어떻게 알겠어요?”

온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은 괜찮은지 묻자 최 씨는 “저희 집도 폭격으로 무너졌다”며 “저희 집이 진짜 무너진 건지 직접 눈으로 확인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일대를 지나던 지인들을 통해 ‘너네 집도 사라졌다’고 들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털어놨다.

가자시티에서 남쪽으로 옮겨 잠시 A 씨 남편 부모님의 집인 ‘텔 엘 하와’ 지역에 머물던 일가족은 그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남부 도시 ‘칸 유니스’로 떠났다. 칸 유니스 인근에선 지인 집에 다행히 머물며 국경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각오하고 떠난 피난길이지만 예상보다 피난 생활은 더 참혹했다. 최 씨는 “가자지구 밖에서 사진,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참혹함은 강도가 다르다”고 떠올렸다. 우선 물자 보급이 오랜 기간 차단됐던 탓에 이들은 콩 캔, 토마토 캔 통조림 등을 먹으며 겨우 연명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식량, 물을 구하기도 했다.

전쟁 진행 상황이나 탈출 가능성을 끊임없이 파악해야 했기에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전력이 끊긴 상황에서 최 씨 가족을 비롯한 가자지구 주민들은 차량용 배터리를 이용해 휴대폰을 충전하거나 태양열 발전기를 통해 전력을 겨우 수급했다. 최 씨는 “태양열 발전기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주고 보조배터리 충전을 부탁한 뒤 그걸 받아와 가족이 휴대폰 전력을 나눠 쓰는 식이었다”고 했다.

● 국경 언제 열릴지 몰라 5, 6번 오가다 극적 탈출
이스라엘의 지상전 확대 과정에서 가자지구 내 통신시설 파괴로 모든 연락이 두절 됐을 땐 그야말로 ‘암흑 지옥’과도 같았다. 최 씨는 “가족, 지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전쟁, 폭격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하던 라디오 전파도 차단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다. 당시 최 씨를 비롯한 피난민들은 이스라엘군이 라디오 전파까지 교란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탈출 직전까지도 통신이 불안정해 조바심이 났다. “우리가 탈출 명단에 들었는지도 알기도 어려웠고, 명단에 들어도 혹시나 한국 대사관 측과 연락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전화도 20번 걸면 운 좋게 그중 한 번 연결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가자지구 남부에 도착한 뒤에는 라파 국경 검문소를 오가며 언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양측의 교전이 격화하는 와중에도 피난처에서 국경까지 5~6번을 오갔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에 담겨 있던 기름마저 점점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씨는 “탈출 직전 검문소로 향했을 때가 저희 차에 있던 마지막 기름이었다”며 “기적적으로 국경이 열려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자지구 북부에서 남부까지 온 가족을 싣고 달렸던 차는 가자지구에 버리고 나와야 했다.

차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족, 친척, 친구들도 가자지구 국경 안쪽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로 국경을 통과한 뒤 대한민국 대사관까지 오는 약 8시간 동안의 여정 중에도 최 씨의 딸은 아끼던 친구들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 “정부가 구하러 올 것이란 믿음 확고해”
최 씨는 “저희를 구해준 대한민국 국력을 느꼈다”며 “전쟁이라는 절박함 속에서도 한국 정부가 저희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들 가족에게 한국 국적은 참혹한 전쟁과 고된 피난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탈출 전부터 탈출 이후까지 직접 박진 외교부 장관이 최 씨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김용현 주이집트대한민국 대사도 이들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받으면서 이들이 대사관 문턱에 이를 때까지 살뜰히 챙겼다. 현장을 바쁘게 오가며 일가족을 직접 데려오고, 수백km를 달리는 중에도 이들의 안전은 물론 식사, 음료를 챙기던 장준원 영사는 물론 여러 상황을 치밀하게 조율했던 최병선 공사의 공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씨 가족은 “한국 정부가 물심양면 모든 걸 도왔다”며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최 씨 가족에겐 10대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7개월 된 막내딸도 있다. 피난 과정에서 영아를 데리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최 씨는 “오히려 우리에겐 희망이었다”며 웃었다.

“전쟁 통에 웃을 일이 없는데 전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가 웃으면 저희도 그제야 ‘하하하’ 따라 웃을 수 있었어요. 막내 아이가 있었기에 우리 가족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느 또래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전쟁 트라우마를 겪은 첫째 딸(18)과 둘째 아들(15)은 번갈아 막내동생을 안고 어르며 가족을 이끄는 부모님의 역할도 대신하고 있었다. 평소 유튜브 등에 영상을 올리며 한국, 팔레스타인에서 일상을 전하던 첫째 딸은 “앞으로는 전쟁의 아픔을 알리는 영상을 계속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삶의 터전과 생계 수단을 잃은 최 씨 가족은 일단 한국을 돌아갈 참이다. 이집트 정부가 외국인들을 자국 영토로 대피시켰지만 오랜 시간 머물게 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기도 했고, 이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유일하게 재시작할 수 있는 곳은 7년 전까지 살던 한국뿐이다. “이집트도, 제3국도 저희 가족의 고향은 아니잖아요. 당장 먹고살 방법도 없어 막막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기 위해 이들이 몸을 실은 승합차 한가운데에는 흔들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영아용 장난감이 놓여있었다. 전쟁 속에서 이들을 버티게 한 또 다른 희망이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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