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종전 76주년… 목소리 작아지는 ‘전쟁범죄 반성’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6일 11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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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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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에서 양산을 쓴 20대 여성 요시무라 씨를 만났다. 그는 배전(拜殿·참배를 위해 세운 건물) 앞에 서더니 합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1분 가까이 묵념한 후 “태평양전쟁 때 돌아가신 증조부에게 인사하러 왔다. 15일에 오면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미리 참배했다”고 했다. 실제 매년 8월 15일에는 이 곳이 전국 곳곳에서 몰려 온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참배를 기다리는 줄이 100m 가까이 이어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1869년 건립된 야스쿠니신사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 근대사의 주요 전쟁에서 숨진 군인과 군속 약 247만 명을 합사(合祀)한 신사다.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를 포함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어 한국 등 주변국에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곳으로, 일본 우익에게는 일종의 성지로 꼽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6년이 흘렀다. 일본 정부는 8월 15일마다 야스쿠니신사 인근의 부도칸(武道館)에서 전몰자 추도식을 개최한다. 언론은 앞 다퉈 특집 기사를 쏟아내고 사회 곳곳에서도 다양한 전쟁 관련 행사가 열린다. 주변국은 “아직도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반성하라”고 규탄하고 우익세력은 “할 만큼 했다”고 맞선다. 올해 8월은 어떨까.

● 야스쿠니에 가득한 ‘전쟁 향수’
요시무라씨와 이야기를 나눈 후 신사 내부의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을 찾았다. 1층 전시실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자살 공격에 사용했던 전투기 ‘제로센(零戰)’이 전시돼 있었다.

유슈칸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식민지 해방전쟁’으로 미화하는 장소다. 무엇보다 태평양전쟁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표기한다. ‘대동아’란 문구에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뜻이 담겼다. 전쟁 당시 일본이 ‘미국과 유럽에 맞서 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설립해 아시아의 자립을 지향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침략전쟁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패전을 부정하고 싶은 우익의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매년 8월 15일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복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행진한다. 욱일기,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다’고 적힌 깃발 등도 나부낀다. 나치독일의 표식인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가)를 어깨에 새긴 제복을 입은 우익까지 등장할 정도다.

전후 총리 중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쪽에 있다고 평가받는 아베 신조(安倍晋三·67) 전 총리는 집권 당시 인터뷰에서 야스쿠니신사를 미국 워싱턴 인근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비유하며 자신의 참배를 정당화했다. 아베는 2013년 12월 현직 총리 신분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해 한국 중국 등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현직 총리 최초로 야스쿠니를 공식 참배한 인물은 ‘보수 거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1918~2019) 전 총리다. 이후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79) 당시 총리, 2013년 아베 등이 야스쿠니를 찾아 주변국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아베의 주장과 달리 야스쿠니에서 500m 떨어진 ‘지도리가후치(千鳥ヶ淵) 전몰자 묘원(墓苑)’이 알링턴 국립묘지와 유사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도리가후치는 해외에서 사망한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전사’와 민간인 유골을 봉납한 국가시설이다. 2013년 10월 방일한 존 케리 당시 미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 또한 ‘지도리가후치 묘원’에 헌화하고 묵념했을 뿐 야스쿠니는 찾지 않았다.

● 주류가 된 전후(戰後)세대, 우경화하는 日
아사히신문은 1일 ‘엄마의 전쟁 기억을 이어가는 의미’란 칼럼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피해의 기억은 형태를 유지하기 쉽지만 문제는 가해(加害)의 기억”이라고 우려했다.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한 가해자이면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국가다. 일본은 갈수록 가해 사실을 없애거나 부정한 채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아베 정권은 소위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조선인 강제연행, 난징대학살 등 가해 역사를 주요 박물관 전시에서 삭제했고 이런 기조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후 세대는 일본이 한때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군림하고 일본 자동차와 전자산업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에게 과거사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 ‘원죄 의식’이 약하다보니 과거사 반성 및 사죄에도 박하다.

여론조사기관 일본여론조사회는 올해 6, 7월 중 성인 1889명에게 실시한 ‘평화’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8월 15일 전몰자 추도식에서 총리가 가해와 반성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를 물었다.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49%)이 ‘언급해야 한다’는 답(47%)보다 많았다.

‘일본이 앞으로 전쟁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는 질문에도 ‘매우 있다’(4%)와 ‘어느 정도 있다’(37%)는 답이 41%를 차지했다. ‘자위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는 질문에도 교전을 금지한 헌법 9조를 개정해 ‘군’으로 명기해야 한다는 답이 21%를 차지했다.

● ‘무라야마 담화’ 지운 ‘아베 담화’

일본의 분위기가 항상 지금과 비슷했던 건 아니다. 전후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발표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97) 총리 담화’는 과거사 반성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당시 무라야마는 현직 총리 최초로 “식민 지배와 침략으로 여러 나라에 손해와 고통을 줬다.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당시 집권 자민당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최초로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한 해 뒤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제1당이면서 과반에 못 미치는 자민당은 무라야마 사회당 대표를 총리로 추대하며 자민당의 강한 보수 색채를 희석시키려 했다. 비(非)자민당 출신인 무라야마 또한 자신의 이름이 담긴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그런 시대적 배경과 무라야마 총리의 개인 소신이 합쳐져 탄생했다.

무라야마 담화가 국무회의(각의)를 통과할 때 ‘일본의 전쟁이 아시아를 해방시켰다’고 생각하며 이 담화에 반대하는 우익 성향의 자민당 출신 각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반대하는 각료를 경질하겠다는 각오로 밀어붙였다.

10년 후인 전후 2005년 8월 15일에는 고이즈미 당시 총리의 담화가 발표됐다. 고이즈미 역시 “식민 지배와 침략으로 여러 나라에 손해와 고통을 줬으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표명한다”며 무라야마 담화의 기조를 계승했다.

일본의 기조가 완연히 바뀐 것은 아베 정권 때부터다. 아베 전 총리는 전후 70주년인 2015년 8월 14일 전임자들과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내놨다. 그는 “전후 세대가 인구의 80%를 넘는다. 전쟁과 관련이 없는 아이들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계속 짊어지도록 할 수 없다”며 과거사에 대한 더 이상의 사죄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일본이 과거 침략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도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다시는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일반론도 펼쳤다.

아베 담화에는 “식민 지배의 파도는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들었다”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문구도 담겼다. “일본은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며 과거형 문구를 사용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집권 자민당 의원들 또한 “사과할 만큼 사과했다”며 당 총재 아베에게 동조했다.

아베 전 총리는 2차 집권 기간(2012년 12월~2020년 8월) 진행된 추도식에서 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가해 행위 및 반성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1994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역대 현직 총리가 추도식에서 일본의 가해 행위와 이에 대한 반성을 언급한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그는 지난해 종전 75주년 추도식에서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의 깃발 아래 국제사회와 손잡으며 세계의 다양한 과제에 역할을 다하겠다”며 ‘적극적 평화주의’를 처음 언급했다.

적극적 평화주의는 표면적으로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적극 기여한다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자위대 역할 확대, 군비 확대로 연결된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 일부 용인, 무기 수출 3원칙 폐지 등 주변국이 반발하는 일본의 모든 행위가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명목 하에서 진행됐다. 유명 역사학자 유이 다이자부로(油井大三郞) 도쿄대 명예교수는 저서 ‘피할 수 있었던 전쟁’에서 “아베 담화는 전쟁에 이르는 과정이 서양 열국에 의한 ‘압력’ 등과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고 주체적인 반성 또한 결여돼 있다. 이런 자세로는 이웃 국가는 물론 국제사회로부터의 공감도 신뢰도 얻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 일왕과 지식인의 반성은 여전


아사히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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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후 일왕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상징적 존재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일왕은 추도식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아키히토(明仁·88) 전 일왕은 2015년 “전쟁을 일으킨 나라로서 ‘깊은 반성’을 한다”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이후 매년 추도식에서 이 표현을 빼놓지 않았다. 2019년 5월 즉위한 나루히토(德仁·61) 일왕 역시 같은 해 8월 15일 부친이 사용한 ‘깊은 반성’이란 표현을 재차 사용했다. 그는 “전후 오랜 기간에 걸쳐 평화로운 세월을 생각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지식인도 과거사 사죄, 전쟁 반대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다. 최근 81세로 별세한 200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전 교토대 명예교수는 자신을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소개하며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유년 시절 고향 나고야에서 미군 공습을 경험한 그는 군대보유 금지, 교전권 불인정 등을 명기한 헌법 9조 개헌에 반대하는 ‘9조 과학자 모임’의 대변인으로도 일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1948년 태어났다. 그 역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다. 지난해 9월 취임한 그는 전임자 아베와 달리 ‘실리’와 ‘실용’을 추구한다. 야스쿠니를 참배한 적이 없고, 아베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가능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목표 또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동시에 과거사를 적극 반성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도 없다. 전임자보다 우익 색채가 옅지만 과거사 사죄에도 큰 관심이 없는 듯한 스가 총리가 15일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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