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대 미국 대통령 ‘아버지 부시’ 별세…탈냉전 이끈 ‘외교의 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일 14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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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센터 웹사이트에 아버지 부시 추모글과 함께 올라온 그의 대통령 재임 당시 사진.
조지 W 부시 대통령센터 웹사이트에 아버지 부시 추모글과 함께 올라온 그의 대통령 재임 당시 사진.
1989~1993년 제41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4세. 부인 바버라 여사가 올해 4월 17일 93세로 사망한 지 7개월여 만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파킨슨병으로 운신이 어려워진 2012년경부터 휠체어와 전동스쿠터에 의지해 생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독일 통일, 소비에트 연방 붕괴 등 냉전 종식의 호재를 맞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 시대를 선언하고 파나마 침공, 이라크와의 걸프전쟁 승리로 미국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탓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져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미국의 전통적 가치에 헌신하며 더 품위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제41대)에 대한 백악관 홈페이지 전기문 일부다. 1989년 1월 20일 취임한 그는 임기 중 오랜 냉전 상대국 소련의 퇴장에 힘입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 역사를 연 대통령이었다.

○ 냉전 종식의 호재를 얻은 ‘외교의 달인’

부통령 시절의 조지 부시가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한 모습.
부통령 시절의 조지 부시가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한 모습.
집권 첫 해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독일이 통일됐다. 1991년 12월 31일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1950년대부터 이어져 온 미소 양극 냉전이 막을 내렸다. 1989년 파나마 침공, 1990~1991년 이라크와의 걸프전쟁 승리 직후 부시의 지지율은 89%까지 치솟았다.

그는 자신이 부통령으로 일했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1981~1989년)과 상반된 대(對) 소련 정책을 폈다. ‘봉쇄와 압박’ 대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개혁과 개방 노선을 지지하는 포용 정책을 전개한 것. 1989년 12월 2, 3일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은 동서 냉전을 마무리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미국이 소련에 대한 경제 지원을 약속하자 소련은 미군의 유럽 주둔을 지지하고 통일 독일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지 않기로 화답했다.

집권 2년째인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의 축하를 받으며 통일을 이뤄 나토에 가입했다. 1991년 7월 미국과 소련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을 체결해 이후 7년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장거리 핵무기를 각각 30%, 38%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 군사력 과시로 ‘세계 최강대국’ 입지 굳혀

대통령 재임 당시의 조지 부시 모습.
대통령 재임 당시의 조지 부시 모습.
부시는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한 ‘먼로 독트린’과 미국의 가치관을 세계로 전파하려 한 ‘윌슨주의’ 실천에 몰두했다.

1989년 12월 20일 미군 2만6000 명이 파나마를 침공해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파나마 대통령을 체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마약 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가 파나마 운하와 파나마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명분이었다. 1990년 1월 3일 체포된 노리에가는 1992년 7월 미국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6일 뒤 부시 대통령은 TV 방송을 통해 미군 파병을 선언했다. 미국의 주도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1월 29일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철수 시한 이틀 뒤 미 공군이 주축이 된 34개국 다국적군이 공습을 개시했다. 미군이 중동 지역에 직접 투입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작전명 ‘사막의 폭풍’으로 알려진 이 공격에 미군 42만5000명, 영국과 일본 등 동맹군 11만8000명이 동원됐다. 2월 24일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 중이던 육군이 투입되고 나서 4일 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며 항복했다.

자신감을 얻은 부시는 재임 4년차인 1992년 국방부 ‘국방계획지침’을 발표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구상을 드러냈다. 이 보고서는 △국방비 대폭 증액 △경쟁 강대국의 출현 방지 △미 군사력의 예방적 사용 허용 △미국의 이익에 어긋나는 다자협조체제 무시 등을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제시했다.

○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경제 위기…재선 실패로 퇴임

국제무대에서는 ‘위대한 미국’의 기치가 기세 좋게 휘날렸지만, 경제 위기 심화로 인해 국내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특히 전임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누적된 무역과 재정 적자(쌍둥이 적자) 문제와 높은 실업률은 임기 내내 부시를 괴롭혔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을 시작해 미국 기업의 수출 길을 넓히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재정 적자는 부시 임기 중반인 1990년에 2조8000억 달러로 10년 전의 3배를 넘어섰다. 부시는 1988년 대선 공화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새로운 증세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세금을 늘리기로 결정하자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삽시간에 무너졌다.

1992년 재선에 도전했지만 위풍당당했던 임기 초 위상은 이미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진 뒤였다. 맞상대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문제는 경제다,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부시의 아픈 구석을 집중 공략했다. 버지니아대 밀러센터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적 성과는 경제 침체에 따른 부정적 여론을 이기기에 역부족이었다. 1992년 미국 유권자들은 새로운 변화를 위해 클린턴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 폭넓은 봉사 활동으로 존경 받은 노년

올해 3월의 조지 부시.
올해 3월의 조지 부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국내외 인권, 자선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펼치며 여생을 보냈다. 2006년에는 필라델피아 시가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공헌한 이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제41대 대통령 부시가 아니라 70여 년간 봉사에 매진한 부시에게 대한 경의를 표한다. 그의 인생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국가에 대한 기여가 얼마나 고귀한 소명인지 보여줬다”고 말했다.

부시는 세 권의 책을 냈다. 자서전 ’Looking Forward‘(1987년),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장군과 함께 재임 시절 외교 정책을 회고해 쓴 ’A World Transformed‘(1998년), 일생 동안 쓴 편지글을 모은 ’All the Best, George Bush: My Life in Letters and Other Writings‘(1999년) 등이다.
부시는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인 1989년 2월과 1992년 1월에 방한해 국회에서 연설했다. 퇴임 후인 2005, 2008년에도 풍산그룹 초청으로 경북 안동을 방문했다.

2012년 파킨슨병을 앓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2년 뒤 90세 생일에 스카이다이빙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직후인 지난해 2월에는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경기장에 나타나 경기 개시를 알리는 동전 던지기를 맡아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건강한 노년을 보낸 최고령 대통령으로 미국 국민에게 긍정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의 뒤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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