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샌드위치만 고집하던 빅터 차, 백인 아닌 한국계였기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일 15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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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 동아일보 DB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 동아일보 DB
이날도 샌드위치였다.

종류는 다양했다. 참치, 햄 앤 치즈, 칠면조….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봤건만 그는 “Take Two. Help yourself(두 개 먹어도 돼. 많이 들어)”라고 했다.

지난해 4월 18일, 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1층 회의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 겸 조지타운대 교수가 한반도 상황을 논의하려고 만든 브라운백(도시락 점심) 세미나에서였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그와 종종 점심을 했다. 장소와 주제는 달랐지만 메뉴는 대부분 샌드위치. 신년 초와 같은 특별한 날엔 파스타였다. 한번은 그에게 “미국인도 열에 한두 번은 일식 도시락 먹자더라”고 했다. 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며 들은 척도 안 했다.

차 석좌의 샌드위치 고집을 보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정글과 같은 워싱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 말이 좋아 그렇지, 그 용광로 온도 조절하고 휘젓는 사람은 백인 엘리트다. 그들과 비슷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주한 미대사 지명설이 돌자 ‘미국식’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확정되기 전엔 아무 말도 안하겠다는 것이다. 기자가 이날 “축하한다”고 떠 봤더니 “나는 이미 정부 일(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을 해봤다. 학교와 연구소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고 정색했다.

그랬던 차 석좌가 최근 주한 미대사 내정자 신분에서 ‘해고’되자 워싱턴에선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코피 전략’으로 불리는 대북 선제타격을 놓고 백악관과 의견이 엇갈렸다는 게 여전히 다수설이다. 충성심 테스트에서 밀렸다는 말도 있다. 닷새 전 워싱턴에서 차 석좌를 만난 외교 소식통 U 씨는 “러시아 스캔들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부하들에게 강한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는데 빅터가 의문 부호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정부가 CSIS에 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빅터가 역할을 했는데 주한미대사로서 이해충돌 문제가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각종 ‘설’은 공교롭게 모두 그가 백인이 아닌 한국계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한 워싱턴 소식통은 “안 그래도 백인이 주도하는 워싱턴인데 백인, 미국 우선주의가 더 심해지고 있다. 가차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돌이켜보면 한국계 최초의 주한 미대사이자 대북정책특별대표였던 성김 현 주필리핀미대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활달한 성격의 김 대사는 워싱턴에선 철저히 미국인이었지만, 퇴근 후엔 종종 지인들과 한식을 먹었다. 그는 족발냉채를 좋아했다. 뼈째 뜯어먹는 한국식 족발은 ‘징그럽다’며 미국 스타일이 가미된 족발을 찾았다. 그런데 족발냉채를 먹으려고 가까운 곳을 두고 워싱턴 국무부 사무실에서 한 시간 걸리는 식당까지 나오곤 했다. 어느날 같이 족발냉채를 먹으며 물었더니 “워싱턴 근처에서 먹다가 미국인 부하들이 보면 좀 이상하지 않겠어”라며 웃었다. 한번은 지인들과 한식당에서 저녁을 하는데 미국인 직원이 배석했다. 그 자리에서 비(非) 한국인은 그 직원 한 명. 하지만 모두 영어를 써야했다. 미국인이 듣고 필요하면 기록해 ‘윗선’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평창 선전전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은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만큼 나쁘지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동시에 빅터 차의 낙마에서 보듯 미국에서 백인 이외의 ‘이방인’은 언제든 내쳐질 수 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적용된다. 혈맹이라고 다를 건 없다. 좋든 싫든 냉혹한 현실이다. 트럼프 시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승헌 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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