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시욱]중국 외교관 우젠민을 애도함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천안함 폭침 때 韓中갈등 커지자 “도광양회 지지, 힘의 외교 반대”
시진핑 외교노선도 과감히 비판 “아직도 전쟁 꿈꾸는 사람 있다”
양식 있는 원로 외교관 별세… 이제 中華민족주의 누가 비판하나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중국의 외교계 원로인 우젠민(吳建民) 전 주프랑스 중국대사가 지난달 18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중국 정부의 올바른 외교정책 수립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은 그가 77세를 일기로 불행을 당한 소식을 들은 양식 있는 중국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우젠민은 한국과의 인연도 깊었다. 그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한국 지인들이 적지 않다. 우젠민은 2007년 2월 전남 여수시가 2012년의 세계박람회(엑스포)를 유치할 목적으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축사에서 “오늘은 비가 왔다. 동양에서는 봄에 오는 비는 희소식이다. 입춘이 지난 시점에서 내린 봄비는 여수에 행운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침내 9개월 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BIE 총회가 그의 예언대로 표결 끝에 2012년 엑스포 개최지를 여수로 결정하자 우젠민 의장은 “여수, 코리아”를 힘주어 외쳤다.

2010년은 중국에 역사적인 해였다. 중국은 이해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해 이른바 G2의 한 축이 되었다. 그런데 이해에 천안함 폭침 사태가 일어나 한중, 미중 간에 심각한 외교적 갈등이 일어났다. 후진타오 정권의 북한 감싸기 정책 때문에 유엔 안보리는 흐리멍덩한 대북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진상 설명을 위한 한국대사의 면담 요청조차 거부하고 환추(環球)시보는 모욕적인 말로 한국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한미 양국은 서해와 동해상에서 대규모 연합 무력시위를 단행했다. 중국 군 당국은 동중국해에서의 미사일 발사 연습으로 대응했다.

후진타오는 이 무렵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과 중국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결정 때도 일본과 노르웨이 정부를 보복 조치로 압박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외교부 자문위원이던 우젠민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 노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힘의 외교’를 비판했다.

우젠민의 이 같은 입장은 금년 들어 유명한 ‘우후논쟁’, 즉 우젠민과 환추시보 총편집 후시진(胡錫進) 간의 외교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논쟁은 뉴욕타임스가 대서특필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논쟁의 발단은 우젠민이 올 3월 30일 외교학원 특강에서 환추시보의 논조가 때로 매우 극단적인데 이는 후시진 총편집이 세계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비판한 데서 비롯됐다.

우젠민은 2014년 7월 자신과 TV토론을 한 바 있는 강경파 퇴역 소장인 뤄위안(羅援)에 대해서도 이날 “그의 매파(강경파)적 논점은 시대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평했다. 우젠민은 세계가 ‘평화와 발전’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데도 전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고 질타하면서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을 비난했다. 그는 민족주의는 종종 애국을 구호로 내세우고, 포퓰리즘은 위민(爲民)의 모양새를 내걸고 있지만 그 본질은 개혁 개방에 반하는 개념들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것은 시진핑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후시진은 이에 대해 4월 7일자 환추시보에 실린 반박문에서 우젠민이 대중과는 동떨어진, 홀로 고상한 척하는 고관의 전형이라고 반격했다. 그는 “우 대사는 민족주의가 화근이라고 하지만 전형적인 비둘기파인 그의 의견은 소수 전직 외교관의 생각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격을 받은 우젠민은 이튿날 같은 환추시보 지상에 반론을 썼다. 그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미국은 전쟁을 할 의지가 없으며 아세안과는 협력할 공동 이익이 있다고 지적하고 언론은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사람 간의 논쟁은 나중에 여러 명의 논객이 가세해 대규모 토론으로 발전했다.

우젠민은 이 토론의 열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후 3일 동안 웨이보와 위챗에 실린 우젠민 관련 기사의 열독수는 무려 1억8000만 회에 이르렀고, 댓글은 2만4000건에 달했다. 영국의 BBC는 우젠민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외교정책 논쟁이 재발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우젠민의 죽음을 충심으로 애도하면서 중국 정부의 과도한 중화민족주의 노선에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우젠민#중국대사#별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