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6·4사태 비화 소개 “계엄군 장성중에서도 진압 반대 있어… 곧바로 체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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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軍투입 알고도 희생 줄이려 학생들 만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군 투입을 며칠 앞두고 시위 진압 지지를 다짐하는 고위 지휘관 회의가 소집됐다. 그런데 38집단군을 지휘하는 쉬친셴(徐勤先) 소장(한국의 준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시위는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역사의 범죄자가 되기보다는 목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일 이 같은 비화를 전하면서 “계엄군 내부에서 무력 진압 반대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쉬 소장은 체포돼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89년 ‘6·4사태’ 25주년을 앞두고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뒷얘기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아들 자오얼쥔(趙二軍) 씨는 최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오 전 총서기가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5월 19일 새벽 광장으로 학생들을 찾아갔을 때 이미 군 투입이 결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오 전 총서기가 “신속히 단식농성을 풀고 돌아가라”고 한 것도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그의 마지막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추진한 개혁은 공정한 규칙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부패가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가 사망한 뒤 그를 추모하는 모임이 5월 13일 단식농성으로 격화됐다. 자오 전 총서기는 그의 육성 구술 저서 ‘국가의 죄수’에서 “학생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5∼18일 방중하기 때문에 정부가 양보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생각은 어긋났다”고 소개했다. 고르바초프가 돌아간 이튿날 오후 10시 베이징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자오 전 총서기는 학생들의 시위 기간에 평양을 방문하면서 자리를 비운 것이 리펑(李鵬) 당시 총리 등 강경파가 득세하는 시간을 벌어주고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도 강경 진압 결심을 굳히게 했다고 측근들에게 술회했다.

한편 6·4사태 당시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으로 시위의 주역이었던 왕단(王丹) 씨는 “학생들이 점거시위를 벌이던 톈안먼 광장으로 통하는 대부분의 도로가 시민들에 의해 막혔는데도 군대가 강제진압 전 시민들의 ‘방어선’ 안쪽에 진입한 것은 넓은 지하 통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왕단의 중국현대사’)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6·4사태 비화#톈안먼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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