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굴레까지 잘라낸 ‘가위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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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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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al Sassoon 1928∼2012■ 비달 사순, 백혈병 투병중 84세로 사망

가위 하나로 여성 헤어스타일의 혁명을 불러온 세계적 헤어드레서 비달 사순이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84세. 그는 1950년대 뜨거운 롤러로 머리를 한껏 말아 올리는 번거로움과 시간의 굴레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또 미용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이날 “사순이 백혈병과 투병 중이었고, 자살이나 타살의 흔적은 없다”고 밝혔다. 각국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이어졌다.

유대인 부모 아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한마디로 도전과 혁신으로 점철된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어릴 때에는 뒷골목 싸움꾼이었지만 커서는 동료 부대원의 40%가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던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 이스라엘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거친 삶을 살았던 그가 세계 헤어디자인계의 상징으로 우뚝 올라선 데에는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런던의 빈민가 이스트엔드에서 태어난 그는 모친이 한때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그를 포르투갈과 스페인 보육원에 맡기는 바람에 보육원에서 6년을 지냈다. 14세가 되어서야 다시 런던에서 부모와 함께 살게 됐다. 본래 꿈은 축구 선수였지만 모친은 “기술이라도 배워 먹고살아야 한다. 이발사가 돼라”며 강제로 아들을 미용실로 끌고 갔다. 고된 생활이 힘들었지만 당시 중동전쟁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온 직후였던 그는 모친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훗날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어머니”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강연자 켄 로빈슨은 세계 각국의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해 2010년에 내놓은 책 ‘엘리먼트’에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달 사순의 성공 뒤에는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다”고 했다.

미용사 초년병 시절 사순의 눈과 마음은 늘 런던의 최고 부자 동네인 웨스트엔드를 향했지만 사투리가 문제였다. 고민 끝에 그는 고객들이 준 팁을 모아 연극 구경을 다니면서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 하면서 발음을 교정했다. 그의 또 다른 학교는 런던의 미술관과 박물관이었다. 사순은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과 건축을 접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꿈에 그리던 런던 웨스트엔드에 자신의 미용실을 처음으로 열었다. 사순은 1960년대 중반 어느 날, 한 여성이 급하게 머리를 깎고 드라이어와 브러시로만 말리는 것을 보고 ‘(물로) 적시고 (가위로) 자르면 끝’인 헤어스타일을 떠올렸다. 이후 그는 단발머리 스타일의 밥(보브) 커트, 귀 부분을 드러내면서 잘라낸 머리끝이 5곳이라서 ‘파이브 포인트 커트’로 불리는 헤어스타일을 선보이는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미용 모토는 ‘가위로 머리끝을 자르는 예술을 지향한다’였고, 그의 좌우명은 ‘군더더기를 버려라’였다. 그의 이런 미용 철학은 1960년대 당시 여성들이 직장에 뛰어들면서 빠른 머리 손질을 원했던 시대적 흐름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를 세계적 헤어디자이너로 만드는 데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1960년대 미니스커트 돌풍을 일으켰던 영국의 최고 패션디자이너 메리 퀀트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표작 ‘로즈메리의 아기’에 주연으로 나왔던 유명 여배우 미아 패로였다. 이 두 사람이 사순의 밥 커트를 하면서 사순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미아 패로 머리로 해 달라”고 찾아온 고객들에게 커트 1회에 당시 돈으로 5000달러씩을 받은 것은 유명한 얘기이다.

그의 관심은 머리 모양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9년 첫 헤어스쿨을 연 이후 전 세계에 ‘비달 사순 헤어스쿨’을 확대했고 샴푸 등 미용제품 브랜드까지 손을 뻗쳤다. 특히 영국을 떠나 1966년 미국 뉴욕에 처음 입성했을 때 뉴욕의 텃세를 뿌리치고 자신만의 헤어스타일을 고집함으로써 글로벌화에도 성공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성공한 후에는 반유대주의를 깨는 운동에도 열심이었고 자선사업에도 나섰다. 그러나 사업은 하락세를 걸었다. 한때 사순이 운영하던 전 세계 업체의 매출은 4억5000만 달러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1985년 P&G에 미용제품 사업을 넘기면서 매출은 서서히 줄었다. 200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생일 때 ‘대영제국 커맨더 훈장(CBE)’을 받았으며 2010년에는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다. 네 번 결혼했으며 말년에는 네 번째 부인 론다와 전처 소생인 자녀 3명과 살았다. 자녀 중에는 헤어디자이너가 없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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