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박해를 먹고 자란다” 천 탈출 도운 ‘오뚝이 투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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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가 후자, 공안에 24시간 심문 받고 풀려나

천광청 변호사의 탈출을 도운 인권운동가 후자 씨(왼쪽)와 아내 쩡진옌 씨가 딸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 2007년 말경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글로벌보이스
천광청 변호사의 탈출을 도운 인권운동가 후자 씨(왼쪽)와 아내 쩡진옌 씨가 딸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 2007년 말경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글로벌보이스
“광청과 트위터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오로지 담을 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는 것을….”

중국의 인권운동가 후자(胡佳·39) 씨는 4월 29일 트위터 계정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글은 다양한 뜻을 담고 있다. 광청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4월 22일 높은 담을 넘어 탈출한 뒤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에 들어간 인권변호사 천광청(陳光誠·41) 씨다. 또 다른 의미는 트위터에 접속하는 것을 막는 중국의 인터넷 검열프로그램인 일명 ‘만리장성 방화벽’을 돌파하라는 것. 중국 누리꾼들은 인터넷 우회 프로그램을 ‘담을 넘는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후 씨는 천 씨의 탈출을 도운 혐의로 연행돼 24시간 중국 당국의 심문을 받고 4월 29일 일단 귀가조치됐다. 그는 트위터에 “심문 받을 때 내가 간경화 환자인 줄 잘 알면서도 눕지 못하고 앉아 있게만 했다”며 “책상을 치며 항의하자 긴 의자를 가져와 3시간 누울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깡마른 몸집에 선한 얼굴이지만 거듭된 체포와 조사, 징역살이에도 자유와 민주, 인권을 외쳐왔다.

그가 천 변호사의 극적인 탈출을 도운 ‘5인의 의인(義人)’ 가운데 핵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가 경탄과 우려를 동시에 쏟아내고 있다. 국가공권력의 횡포로부터 기본적 인권이나 안전을 담보하기 힘든 중국 같은 통제사회에서 반체제 인사의 탈출을 돕는 것은 자신을 희생할 살신성인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후 씨는 이미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러 다시 기소될 경우 누범(累犯)으로 간주돼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처지다.

1973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후 씨는 베이징경제학원(현 수도경제무역대학)을 졸업한 뒤 티베트 영양 보호운동 등 환경운동에 투신했다. 28세 때인 2001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기관보인 중국청년보는 그를 ‘조용하고 예의바르며 용감하고 겸손해 젊은이들의 모범’이라고 칭찬했다. 모범 청년이 관심영역을 에이즈 환자, 인권 등으로 옮기자 박해가 시작됐다. 그는 중국의 인권탄압 실태 등을 고발해 왔다. 이 과정에서 천광청 등 같은 길을 걷는 인권운동가들과 친해졌고 이들의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2007년 11월 유럽의회에서 중국 인권실태를 증언한 그는 그해 12월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인권운동 동지인 부인 쩡진옌(曾金燕·29) 씨가 딸을 낳은 지 한 달쯤 됐을 무렵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2008년 3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그해 그와 부인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후 씨는 유럽연합(EU)이 수여하는 사하로프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만기 출소한 후 씨는 홍콩 신문에 “나는 내 딸이 태어날 때, 그 아이를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 법치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 세대가 우리처럼 고통받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했다. 고통과 박해를 거쳤지만 더욱 단단해져 돌아온 것이다.

그는 24시간 공안이 감시하는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천광청과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劉曉波)의 행동을 지지하다 올해 초 다시 공안에게 집을 압수수색당하기도 했다.

후 씨가 이번에 어떤 경위로 천 변호사의 탈출을 돕게 됐는지 자세한 경위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후 씨가 4월 28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두 인권운동가의 진한 우정과 동지애가 느껴진다.

“2011년 7월 25일 밤 광청의 집 근처에 설치된 휴대전화 신호를 차단하는 설비에 벼락이 떨어졌다. 광청과 그의 아내는 (이 틈을 타) 나의 38세 생일 축하 전화를 걸었다. 내 평생 가장 귀중한 생일축하 전화였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중국#천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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