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공산당 90년]<下>일당 지배의 과거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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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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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 - 정치 안정 뒤에 도사린 13억 ‘민주화의 배고픔’

《 중국은 내년 10월 예정된 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현 지도부는 물론이고 새 리더들은 공산당 집권 90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일당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경제 성장의 과실을 나누자는 요구가 늘어나는 등 갈등 요인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라는 과업은 이뤘지만 공산당 일당지배가 장기화하면서 정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소화하는 것이 당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
마오쩌둥 대장정 끝내고 머물던 옌안의 토굴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1936년 대장정을 마치고 도착한 산시 성 옌안의 양자링 계곡에 마오가 살았던 토굴집이 보존되어 있다. 옌안에서도 몇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38년 11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머물렀다고 표시돼 있다. 혁명 성지를 찾는 ‘홍색 관광객’ 끊이지 않는다. 동아일보DB
마오쩌둥 대장정 끝내고 머물던 옌안의 토굴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1936년 대장정을 마치고 도착한 산시 성 옌안의 양자링 계곡에 마오가 살았던 토굴집이 보존되어 있다. 옌안에서도 몇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38년 11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머물렀다고 표시돼 있다. 혁명 성지를 찾는 ‘홍색 관광객’ 끊이지 않는다. 동아일보DB
이와 관련해 중국 지도부들은 싱가포르를 주목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국부’로 존경받는 리콴유(李光耀) 선임장관이 자신이 이끌던 인민행동당(PAP)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지자 경제 성장 이상의 ‘변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분출하고 있다고 판단해 내각에서 물러난 것은 중국에도 시사점이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더욱이 대외적으로는 ‘주요 2개국(G2)’으로 불릴 만큼 강대국이 됐지만 서방의 견제가 늘고 있고 주변국과의 갈등도 커지고 있어 대응책 모색이 시급한 시점이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 외교’를 휘두르려 한다는 서방의 의혹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 집단적 의사결정 체제 정착


1920년대 후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군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혁명세력이 은거했던 장시(江西) 성 징강산(井岡山)과 루이진(瑞金)을 함락시킨 후 ‘3가지 말살정책’을 펼 만큼 지독한 토벌작전을 구사했다고 한다. ‘돌은 칼로 베고, 초목은 불사르고, 사람은 종을 바꾼다’는 것.

공산당 세력은 루이진에서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까지 2년여간 9600km를 도피한 후 옌안에서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산 중턱에 굴을 파고 살았다. 이제 혁명 1세대는 물러갔지만 중국 국민과 당 지도부의 뇌리에는 고난을 이겨낸 자신감이 배어 있다.

중국이 정치적 안정 속에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혁명정신의 전통을 함께하면서 집단지도체제가 정착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배엘리트 간 갈등과 분열 요소를 권력 분점으로 완화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변화 욕구에 공동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지만 주요 국가 정책은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의 합의 등 집단적인 의사 결정을 통해 수립되기 때문에 집행할 때 단결하고 힘이 실린다.

○ 혁명가→ 지도자→ 정치가로


최고지도부의 성격이 시대 변화에 맞게 변해가고 있는 것도 정치 통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통치 시절 ‘영웅적인 혁명가’로 절대권위를 인정받았다. 장쩌민 전 주석과 후진타오 주석은 1949년 공산당 주도의 건국 이전에 본격적인 혁명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최고지도자 덩의 지명과 낙점이라는 후광을 입었다.

중국 지도부가 권위와 후광이 아닌 능력과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서구형 정치가’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후광으로 ‘태자당’으로 불리지만 그가 지난해 군사위원회 부주석까지 오르며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한 것은 그런 후광 때문이 아니라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치열했던 권력 투쟁


외관상 안정돼 보이는 중국의 지도부 내에선 90년간 치열한 권력투쟁과 숙청이 반복됐다.

공산당 내 권력투쟁은 건국 이전 혁명기부터 이어졌다. 마오는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 성 쭌이(遵義)회의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 이전에는 실권을 잡지 못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마오의 지도노선을 지지하는 결의가 이뤄지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장궈타오(張國燾)의 군대가 산시 성에서 궤멸된 반면 마오가 이끄는 홍군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무사히 옌안에 도착한 것이 큰 계기가 됐다.

창당 때부터 시작해 1∼5차 당대회 기간에 총서기를 맡았던 천두슈(陳獨秀)는 ‘깨어있는 근대화 지식인’으로서 봉건주의 타파를 내건 사상으로 마오를 포함한 초기 공산당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농민 무장 투쟁 등에 반대해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리면서 숙청되지는 않았지만 당 지도부에서 배제됐다.

1959년부터 10년가량 국가주석을 지낸 류사오치(劉少奇)는 마오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주자파로 몰려 실각한 뒤 말년에는 1969년 카이펑(開封)에서 반감금 상태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한때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린뱌오(林彪)가 마오와 맞서다 실패한 후 1971년 국외로 탈출하다 비행기 추락사한 것도 권력투쟁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마오에 의해 3번이나 실각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현 집단지도체제가 정착된 것은 1997년 사망한 덩샤오핑 집권 후반부터다.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실각한 것은 정치 민주화 속도 등을 놓고 벌어진 리펑(李鵬) 총리 등 보수파와의 갈등 때문이다.

물론 현 집단지도체제에서는 과거 같은 노골적인 숙청 등은 벌어지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차기 권력을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원자바오, 개혁 주장하다 고립”… 민주적 정치개혁 가능할까 ▼

중국 공무원들에게 “정부와 공산당 중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한결같이 ‘공산당’이었다. 당이 살아남으면 정부는 다시 만들면 된다는 논리다. 중국에 정부의 군대는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인 230만 명의 인민해방군은 당의 군대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시신에는 당의 깃발을 덮는다. 당원이 아니면 공무원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일각에서 공산당 일당독재가 중국의 부활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낳는 법. 현재 중국 공산당에는 부패 권력남용 관료주의 등 부정적 표현들이 덧칠해졌다.

상당수 전문가는 중국의 경제성장 유지가 공산당 일당독재에 결정적인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베이징의 한 정치학 박사는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를 도입했고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버렸다”며 “일당독재의 지속은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성장을 언제까지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내다봤다.

일당독재 폐지 요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보다 낮은 수준이지만 민주에 대한 요구가 공개적으로 분출된 것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다. 당시 시위대 요구에 동조하던 당 최고 지도부가 숙청되고 인민해방군에 진압됐지만 이후 당에 남긴 상처는 컸다. 현재도 공개적이지 않지만 당 내부에서 이런 요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최근 비교적 뚜렷한 인물은 공산당 서열 2위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다. 원 총리는 전면적인 다당제나 삼권분립 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의 정치개혁은 △사법부 독립 △점진적이고 직접적인 선거제도 △인민과 언론의 정부 감시 등으로 볼 수 있다. 원 총리는 오래전부터 이런 내용의 정치개혁을 주장해 왔다.

반면 올해 3월 공산당 서열 2위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은 ‘다당제’ ‘삼권분립’ ‘양원제’ ‘연방제’ 등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 간에도 이처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톈안먼 사태로 장관급에서 실각한 이후 중국 개혁을 줄곧 주장해 온 88세의 공산당 원로 두다오정(杜導正) 씨는 최근 “원 총리가 지난해 9월 최고 지도부 간의 토론에서 정치개혁을 주장하다 좌파에 밀려 고립됐다”고 말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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