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독재’ 판도라 상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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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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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의 오른팔’ 쿠사 외교장관 영국 망명

《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오른팔’로 불리며 리비아의 각종 해외공작과 테러활동을 지휘해온 무사 쿠사 외교장관(61·사진)이 카다피 원수를 등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은 카다피 정권에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1988년 미국 팬암기 폭파 등 카다피 정권이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사건들의 실체가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질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
○ 카다피 최측근이지만 서방과도 친해

영국 외교부는 3월 30일 “쿠사 장관이 튀니지를 거쳐 런던 서남부 판버러 공항에 도착했다”며 “그는 장관직을 사임한다면서 본인의 자유 의지로 영국에 왔다”고 밝혔다. 리비아에서 장관급이 카다피 정권을 떠난 것은 2월 21일 압둘 파타흐 유네스 전 내무장관과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법무장관이 반카다피군에 합류한 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쿠사 장관은 현재 영국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쿠사 장관은 지난 30여 년간 카다피 원수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며 리비아 정권의 각종 해외공작에 직간접으로 간여해 왔다. 1978년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주영국 대사 등을 거쳐 1994년부터 15년간 리비아 정보기관 수장을 지냈고 외교장관에는 2009년 발탁됐다. 쿠사 장관은 1988년 270명의 사망자를 낸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의 팬암기 폭파사건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사건의 범인 압델 바세트 알리 알메그라히의 2009년 리비아 송환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 영국대사 시절에는 “영국 내 반체제 리비아인들을 숙청하겠다”는 언론 인터뷰를 한 뒤 영국에서 쫓겨났다. 지난달 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카다피 원수의 퇴진을 촉구했을 때는 “어린애처럼 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런 최측근 쿠사 장관의 심경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카다피 원수가 전투기를 동원해 유혈 진압에 나서면서부터일 것이라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행금지구역 결의안 직후 쿠사 장관의 태도가 달라졌다”며 “반군과의 휴전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리비아의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할 때 그의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카다피 원수 아들들과의 불화설도 망명 원인으로 꼽고 있다.

사실 쿠사 장관은 언제든지 카다피 원수와 결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지목돼 왔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적이 있고 영어에도 능통해 서방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대 이후 리비아와 서방 간의 대화를 주도했고 2003년에는 카다피 원수가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다른 측근에게도 카다피와 결별 촉구


쿠사 장관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다국적군은 카다피 정권의 내부정보 획득과 반군 사기 진작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기대하고 있다. 또 향후 카다피 원수가 전범으로 국제재판을 받게 될 때 그의 범죄행위를 입증할 유력한 증인도 얻게 됐다. 정권의 핵심 인사가 순식간에 정권의 비리를 폭로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로 바뀐 셈이다.

더 큰 수확은 다른 측근들의 이탈을 부추겨 카다피 정권의 자멸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가디언 등 주요 외신들은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최근 쿠사 장관과 잇달아 접촉을 가져왔다”고 전하며 서방국가들이 그의 망명을 위해 꾸준히 설득 작업을 벌여온 것으로 추정했다.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장관은 “쿠사 장관에게 어떠한 면책 제안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무사 이브라힘 리비아 정부 대변인은 처음엔 “외교 임무를 띠고 런던에 간 것”이라며 망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31일 “(현재 상황은) 나라 전체를 위한 투쟁이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높은 서열이든 개개인이나 관료들에게 (정권 유지를) 의존하지 않는다”며 망명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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