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소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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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지진참사로 고아 38만→100만명으로 급증
“시간이 없다” 美-加-佛 등 세계 각국 입양 수송작전

지진으로 건물 잔해에 깔려 다리를 잘라낸 두 살배기 아이를, 집도 남편도 잃은 엄마는 구조대가 어렵게 아이를 구출해냈지만 데려가기를 거부했다. 오른발을 잘라낸 11세 소녀에게는 돌봐줄 친척이 하나도 없다. 13세 소녀 장 페테르송 에스팀은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한 공원에서 혼자 노숙하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아이티에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지 열흘째인 21일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엔 수만 명의 어린이가 방황하고 있다. 이른바 ‘지진 고아’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에 따르면 연이은 허리케인과 수십 년째 계속되는 정쟁으로 살림살이가 황폐화하면서 버려진 아이티의 고아는 지진 발생 전 이미 38만 명에 이르렀다. 이번 지진으로 부모를 잃거나 버림받은 아이티 어린이는 60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 “빠른 입양만이 아이들의 목숨을 구한다”

아이티 어린이의 이런 참혹한 모습이 전해지면서 국제입양단체인 ‘국제아동봉사공동협회(JCICS)’에는 아이티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는 전화와 e메일이 매일 50∼100건씩 답지한다. 지진 전에는 한 달에 10건 정도가 고작이었다. 미국의 다른 입양기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마이애미의 태미 게이지 씨 부부는 아이티 어린이를 입양하기로 하고 입양단체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3명의 자녀가 있지만 게이지 씨 부부는 아이티 참사를 전하는 TV 뉴스를 보고 입양을 결정했다.

지진 발생 이전, 아이티 어린이를 입양하기로 하고 최종 입양절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양부모들의 마음은 더 까맣게 타들어간다. 지진으로 고아 리스트 등 입양 관련 서류가 대부분 분실된 데다 입양 시스템마저 완전 붕괴됐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 가톨릭 마이애미대교구는 지난주 미 정부에 아이티 고아를 비행기로 대량 수송해올 것을 요청했다. 50년 전 쿠바 공산화를 피해 1만4000여 명의 쿠바 어린이를 2년에 걸쳐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데려온 ‘페드로 판(동화 피터 팬의 스페인어)’ 작전을 다시 한 번 실행해달라는 요구다. 이들은 미국 입국 비자를 받을 자격이 충족되지 않은 아이티 고아를 위해 미 국토안보부와 국무부에 특별 입국을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인류애에 호소하는 이런 노력은 각국에서 결실을 보고 있다. 미 정부는 이들 고아에게 ‘인도적 임시 입국 허가(humanitarian parole)’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일 아이티 고아 53명을 태운 비행기가 미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도착했다. 미 인디애나 주의 보육원 연합체 ‘키즈 얼라이브 인터내셔널’은 고아 50명을 이웃나라인 도미니카공화국의 안식처로 옮겼다. 20일에는 고아 109명을 태울 네덜란드 정부의 전세비행기가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다. 캐나다 프랑스 등도 아이티 고아의 입국을 허용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21일 “입양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며 “빨리 할수록 더 많은 어린 목숨을 구한다”고 주장했다.

○ “입양만이 능사는 아니다”는 반론도

지진 발생 이후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등에 도착한 아이티 고아는 대부분이 지진 이전에 입양이 결정된 어린이다. 지진 고아는 아직 이 대열에 끼지 못했다. 더욱이 입양 전문기관들은 많은 지진 고아를 성급하게 입양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JCICS의 토머스 디필리포 대표는 20일 미국 공영라디오방송(NPR)과의 인터뷰에서 “입양보다 시급한 것은 방황하는 아이들을 거리에서 보호하고 치료하는 일”이라며 “해외로 대량 입양을 보내는 방법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최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입양되는 아이의 가족 또는 친척이 살아있을지 모르며 △주변 환경과 문화의 급격한 변화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을지 모르는 아이들이 더 큰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며 △인신매매나 사기 등이 우려되며 △고아 수십∼100여 명을 공항이나 각국 대사관까지 옮길 때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이유 등을 들어 ‘빠른 대량 입양’을 꺼리고 있다. 따라서 먼저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보호자가 있는지 확인한 뒤 입양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니세프 측은 이런 절차를 밟으면 2개월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2차대전 직전 유대인 어린이 1만명 英에 피신
1937년 스페인 내전땐 2만명 탈출도▼

아이티 지진 이전에도 안전이 위태로운 많은 어린이를 ‘사지(死地)’에서 구해낸 적은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어린이 대량 피신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1939년 영국의 주도로 진행된 ‘어린이 수송(Kindertransport)’이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지의 유대인 대표들은 1938년 11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에게 유대인 어린이를 받아줄 것을 은밀히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1939년 8월 전쟁 발발 며칠 전까지 영국에 도착한 어린이는 모두 1만 명에 달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전쟁 중에 살아남았지만 ‘성공’이었다는 표현을 쓰기는 어려웠다. 이들 중 전후 부모와 상봉한 어린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부모들이 나치의 유대인수용소에 잡혀가서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때는 프랑코 정부의 핍박을 받던 바스크 지역의 어린이 2만여 명이 영국 벨기에 등 서유럽 국가와 옛 소련, 멕시코 등지로 피신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서유럽으로 피신한 어린이들은 거의 다 부모를 만났지만, 옛 소련으로 간 아이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가족과 상봉하지 못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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