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숙’ 터키-러시아 화해모드 돌입

  • 입력 2009년 8월 21일 02시 58분


터키, EU가입 실패 후 양국 경제 협력 강화
총리회담 정례화… 美-유럽 ‘의심의 눈초리’

오스만튀르크제국과 제정 러시아는 18∼19세기 영토전쟁을 6차례나 치르는 등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날 때까지 앙숙이었다. ‘러시아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터키인들의 통설처럼 두 나라 국민들은 서로 믿지 못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터키는 냉전 때도 사회주의의 남하를 저지하는 반소·반공 국가로 옛 소련과 끊임없이 부딪쳤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껄끄러웠던 터키-러시아 관계가 최근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오랜 앙숙이던 터키와 러시아가 새로운 동반자가 됐다”며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터키-러시아 동맹에 대해 미국과 유럽 등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터키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EU)이 이슬람국가인 터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러시아는 그동안 쌓아올린 터키와의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진 터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터키의 영자 일간지 ‘투데이스 자만’은 “터키와 러시아는 상반기 6개월 동안 5차례의 고위급 방문을 성사시켰다”며 “양국 관계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돈독해진 양국 관계는 이달 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터키 수도 앙카라를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20개의 상호협력 협정을 무더기로 체결하면서 구체화됐다. 러시아는 자국산 가스를 유럽으로 수송하는 사우스스트림 가스관이 흑해 내 터키 영해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을 터키 측에 요청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터키가 거부할 경우 이 가스관은 이미 러시아와 수차례 가스 분쟁을 겪은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멀리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푸틴 총리는 반대급부로 터키 내 핵발전소 건설과 흑해∼지중해를 연결하는 송유관 사업을 러시아가 지원하고 러시아로 수출되는 터키 상품의 세관검사 규제를 완화하기로 약속했다. 또 터키와 러시아는 매년 총리급 회담을 한 차례씩 열고 장관급 회담도 연 2, 3회씩 열기로 합의했다.

터키 경제정책연구재단의 경제분석가 니하트 알리 외즈잔 씨는 “터키와 러시아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터키와 EU 관계가 약화됐다는 것을 뜻한다”며 “터키-EU 관계가 크게 나아질 조짐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터키-러시아 관계 개선은 교역과 관광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1992년 14억8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양국의 교역 규모는 2000년 45억3000만 달러에 이어 지난해 378억5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러시아는 터키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섰고 터키도 러시아의 다섯 번째 교역국으로 성장했다. 터키 남부의 유명 휴양지인 안탈리아에는 최근 러시아 관광객이 몰리면서 처음으로 독일 관광객 수를 앞질렀다. 지난해 터키를 방문한 러시아 관광객은 무려 300만 명에 이른다. 터키 남부 해안에는 러시아 자본이 몰려와 호텔 건축 붐이 일고 있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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