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경제 구한 뚝심 재무…‘공공의 적’서 ‘스타 각료’로

  • 입력 2009년 5월 29일 02시 57분


노동계 “돈 풀어라” 거센 압력에 곰처럼 버텨

원자재 값 폭등 호시절에도 긴축재정으로 자금 비축
불황 닥치자 즉각 부양책, 무디스 신용등급 한단계 상향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던 2006년.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 칠레는 ‘돈벼락’으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당장 돈을 풀라는 요구가 내부에서 빗발쳤다. 경제수장인 안드레스 벨라스코 재무장관(48·사진)은 “돈을 아꼈다가 어려울 때 써야 한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칠레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달러 대비 페소화 가치는 올 들어 10% 상승했고 3월 무디스는 칠레 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상향조정했다. 27일 월스트리트저널은 ‘포퓰리즘에 흔들리지 않은 벨라스코 장관의 뚝심 덕분’이라고 했다.

○ “맑은 날 우산 준비해야”

2006년 3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취임과 함께 재무장관에 오른 벨라스코 장관은 구리 값 폭등이 가져다준 호황이 거품경제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상품가격 폭락과 불황에 대비하자는 것. 그의 이런 통찰은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비롯됐다. 그는 어린 시절 1970년대 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뒤이은 군부 쿠데타, 1980년대 초 구리 가격 폭락사태 등 칠레의 혼란상을 지켜봤다. 1989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0년부터 하버드대 존 F 케네디 정책대학원에서 국제금융과 개발론을 강의하는 학자의 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와 장관에 취임했을 당시 정부 유동자금은 59억 달러. 위기를 막기엔 불충분했다. 그는 정부 예산을 짤 때 현재 시점 구리 가격이 아닌 향후 10년간 평균가격에 근거해 책정토록 법제화했다. 구리 가격이 예상 가격보다 올라 발생하는 초과수입은 모두 비축 펀드에 넣도록 했다. 2007년 예산에 반영된 구리 가격은 파운드당 1.21달러였지만 실제 시장가격은 3달러가 넘었다. 초과 재정수입 60억 달러는 비축 펀드에 넣고 관리했다. 외채도 갚아 2007년에는 독립(1810년) 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이 됐다.

“돈이 남아도는데 긴축정책을 펴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연금과 복지를 늘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노동계는 벨라스코 장관 모양 인형을 불태우는 과격시위를 벌이며 총파업에 나섰다. 여당 내부에서도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금고에 돈다발을 쌓아두고 정권을 고스란히 야당에 넘기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건방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비리그 출신 기술관료’ 등의 인신공격도 이어졌다.

빗발치는 사임 압력 속에서도 그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지지율 30% 미만의 인기 없는 장관을 끝까지 믿어준 바첼레트 대통령의 용기도 대단했다. 현 정부 초부터 계속 자리를 지킨 장관은 단 5명. 외교 국방 등 주요 부처 가운데선 벨라스코 장관이 유일하다.

○ 불황에 빛을 발하다

그러다 금융위기와 함께 구리 값이 반 토막이 났고 수출과 소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외국투자자들도 짐을 쌌다. ‘수동적이고 굼뜨다’는 비난을 받았던 벨라스코 장관은 불황이 오자 기민해졌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마자 미국을 방문해 금융위기 현장을 점검했고 재계 지도자들과 서민을 만나 현실 얘기를 들었다. 즉각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제 돈을 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호황기에 그가 모아둔 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외환보유액 232억 달러, 비축 펀드 255억 달러 등 487억 달러. 국내총생산(GDP)의 30%나 된다. 1월 초 40억 달러 경기부양책이 상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공근로 프로젝트, 기업에 대한 감세 및 청년 고용을 위한 보조금 지급, 주요 산업 설비투자, 저소득층 170만 명에 대한 현금 지급 등에 투입했다. 호황기에 은행을 건전화해 둔 덕분에 은행 부실도 없었다. 국민의 마음도 움직였다. 바첼레트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난해 8월 42%에서 올 4월 67%로 수직상승했다. 벨라스코 장관도 각료 인기 순위 1위에 올랐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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