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日, 사주고 돈 빌려주고 ‘큰손 외교’

  • 입력 2009년 5월 4일 02시 55분


‘내코 석자’ 美힘뺀다

《넉넉한 외환보유액과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진 중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선진국에는 구매외교, 개발도상국에는 자원외교와 차관외교를 펼치며 ‘세계의 큰손’ 차이나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아시아공동기금에 384억 달러를 내놓기로 하는 등 중국을 견제하며 자국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미국은 일본과 중국의 행보에 내심 우려하면서 ‘금융위기의 진원지’라는 멍에를 벗으려 애쓰고 있다.》

○세계의 큰손 中

외환보유액 2조달러 막강

구매-자원-차관외교 활발

중국이 금융위기를 틈타 구매외교와 자원외교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무상 원조와 저리 차관을 미끼로 천연자원을 싹쓸이하는 자원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그동안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선진국을 상대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제품과 기술을 사주는 구매외교를 통해 국제무대에서의 위상과 발언권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영향력 확대의 원천은 2조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외환보유액과 거대한 내수시장이다. “돈이 권력이라면 중국은 현재 매우 힘 있는 위치에 있다.” 지난달 초 미국의 CNN은 이런 설득력 있는 분석을 내놨다.

중국은 올해 2월부터 최근까지 크고 작은 구매사절단과 투자단을 조직해 세계 여러 나라에 파견했다. 중국은 올 2, 3월 잇달아 독일 영국 등 유럽 4개국에 구매 및 투자사절단을 보냈다. 지난달 말엔 미국에 구매단을 보내 163억 달러어치의 제품을 사줬다. 이달엔 광시좡(廣西壯)족자치구가 대만에 구매단을 보낸다. 중국의 대만 구매단 파견은 처음이다.

정치적 효과는 크다. 티베트와 약탈문화재 문제로 중국의 심기를 건드려 온 프랑스의 ‘백기투항’이 대표적이다. 올 2월 중국은 구매단 파견국에서 프랑스만 제외했다. 이미 협상중이던 100억 유로의 항공기 구매계약도 중단했다. 그러나 중국은 프랑스 측이 고개를 숙이자 다음 달 유럽구매단 방문 대상에 프랑스를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천연자원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올 2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은 비슷한 시기 브라질 등 남미를 돌았다. 이들은 순방 기간 각각 수백억 달러 규모의 원조 및 차관 협정을 맺었다.

중국은 올 3월에는 케냐에 300만 달러 규모의 무상 원조를, 앙골라엔 1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지난달에도 에콰도르와 카자흐스탄, 몽골에 각각 10억, 100억, 15억 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차관의 상당 부분은 원유로 돌려받는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아시아 품는 日

채무 위기 아세안國 위해

총 10조엔규모 자금 지원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는 일본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 지역의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모두 10조 엔(약 130조 원)에 이르는 자금 지원에 나선다. 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 일본 재무상이 밝힌 내용이다.

일본 정부는 우선 6조 엔 규모의 자금을 마련해 아시아 각국이 급속한 외화 유출로 통화 가치가 폭락하고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하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긴급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는 위기발생국과 통화스와프(교환) 협정을 맺어 엔화를 직접 공급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를 위해 100조 엔(약 1조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국제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기관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있지만 아시아에서 위기 대응을 위해 엔 자금을 융통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이 같은 지원을 통해 역내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엔화의 국제화도 동시에 추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아세안+3의 역내 상호 자금지원 체계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와 관련해 달러화 기준으로 384억 달러를 분담하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아세안+3은 2월 CMI 기금을 현행의 1.5배인 1200억 달러로 증액한다는 데 합의했으며 이 중 아세안 국가가 20%인 240억 달러를 분담하고 나머지 80%는 한중일 3국이 1 대 2 대 2로 분담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는 아시아 각국이 일본 시장에서 발행하는 엔화 표시 국채(사무라이채)에 대해 일본 국제협력은행을 통해 최대 5000억 엔까지 보증해 주기로 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영향력 잃는 美

‘워싱턴 컨센서스’ 가고

‘베이징 컨센서스’ 올수도

“‘워싱턴 컨센서스 시대’가 끝나고 ‘베이징 컨센서스 시대’가 올지 모른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영국 출신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워싱턴 소재) 선임연구원이 1989년 미국과 세계은행 등이 경제위기에 처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처방책으로 합의한 경제정책 묶음을 지칭하며 사용한 용어다. 그 후 “자유무역, 규제 완화, 민영화 등 미국식 경제정책이 세계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는 취지로 통용돼 왔다. 그런데 이젠 중국이 서서히 주도권을 뺏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담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표현이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제3세계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동시에 중국이 거침없는 제3세계 지원 행보에 나서자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미 언론과 전문가들은 최근 중미 카리브 해의 자메이카가 겪은 경제위기를 예로 든다. 통화가치가 추락하고 은행 부실이 심화되자 자메이카 정부는 미국 등에 SOS를 보냈다. 하지만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영국은 금융위기로 자신들의 코가 석자였다. 이때 중국이 나서서 올 3월 무려 1억38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자메이카에선 최대의 금융 파트너가 되어준 ‘중국의 통 큰 씀씀이’에 대한 찬사가 하늘을 찔렀다는 게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다. 물론 중국은 구체적인 경제정책 방향을 주문하지는 않았으며, 자유시장 모델을 지향하는 국가 운영 방향도 변함없다고 자메이카 정부는 설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달러화를 대체할 새로운 준비통화를 만들자는 중국의 제안에 중국으로부터 최근 차관을 받은 카자흐스탄과 파키스탄이 동의하고 나선 것도 주목했다. 미국은 중국이 새로운 준비통화를 운운하는 건 미국에 달러화를 마음대로 찍어내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서방의 이런 경계심은 중국이 제3세계에의 경제 원조를 대만과 단교하라는 압력수단으로 활용했던 전력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나 중남미에선 중국 모델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방 주도 경제 질서에서 무시됐던 부와 권력의 국제적 재분배가 중국식 모델에선 개선될 것이란 기대감이 싹트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물론 아직은 미국 사회에서 이런 주제의 토론들은 민주화, 다원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중국식 경제성장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에 근거한 ‘자신감’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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