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식자본주의 시험대에 올랐다”

  • 입력 2009년 3월 30일 18시 00분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2차 대전 후 세계 금융계를 이끌어 온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9일 "1944년 이후 세계 경제시스템의 기반 역할을 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영미식(Anglo-American) 자본주의'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번 G20정상 회의는 1944년 영국과 미국이 미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을 창설한 이후로 세계 금융시장을 이끌어 온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이 계속 생존할 수 있을지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것. 브레튼우즈체제는 2차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수상이 규제완화와 시장위주의 정책을 표방했던 금융체제이다.

실제로 G20회의를 앞두고 프랑스, 독일 등 EU국가는 물론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들도 규제완화와 시장위주의 정책을 펴는 '앵글로-색슨'식 금융체제에 대한 개혁을 강도높게 요구하고 있다.

▽미영, 추가 경기부양안 압박후퇴=월스트리트 저널은 30일 '미국이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초점을 옮겼다'는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가 경기 부양책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국제금융 규제강화를 위한 협조활성화 쪽에 비중을 두기로 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도 29일 정상회담 코뮈니케 초안을 입수했다고 보도하면서 "24개항 가운데 (추가) 경기 부양책이 포함돼있지 않다"고 전했다.

미국은 경기부양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으로 끌어올리라며 독일과 프랑스를 강하게 압박해왔다.IMF는 G20 국가들이 GDP의 최소 2% 이상을 경기부양책으로 쏟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국의 경우 '사회안전망'이 자동적으로 가동됨으로써 실질적인 부양액이 독일의 경우 이미 GDP의 5.2%에 이른다며 추가부양안을 일축해왔다. EU순회 의장국인 체코의 토폴라넥 총리는 "미국의 경기부양안과 구제금융안은 '지옥에 이르는 길'(road to hell)이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가디언과 인디펜던트 등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29일 경기부양안에서 '오바마와 한 팀'을 이뤄원 브라운 총리가 정치적 소득 없이 G20 정상회의를 마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신흥국들도 선진국 금융시스템에 거센 도전=G20의 회원국에는 기존의 서방선진국(G7) 외에도 러시아 및 브라질, 인도, 중국 등 브릭스(BRICs)국가, 한국, 아르헨티나, 멕시코, 터키, 호주. 남아공,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등이 참가한다. 미국 대 유럽의 구도 뿐 아니라 기존 선진국에 대한 신흥국가들의 거센 도전도 거세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28일 칠레에서 열린 세계진보정상회의에서 "세계경제를 거대한 카지노로 전락시킨 무책임하고 무모한 행위들로 인해 세계 전체가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에 앞서 26일에는 영국 고든 브라운 총리와 정상회담 직후 "경제위기가 '파란눈의 백인'들의 비이성적 행동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룰라 대통령은 "금융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들일수록 은행을 '국유화'해야 한다"면서 "미국 및 유럽국가들이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것이 아니라 부실은행을 국유화해 건전성을 되찾고 신용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인도는 아시아 신흥개발국의 경쟁력인 저임금 수출길을 가로막는 보호주의에 맹공을 퍼부을 태세이고,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도 최근 영국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 재정을 축적해 왔다"며 이번 경제위기에 책임이 없는 국가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높아지는 IMF개혁 요구="미국 등 서방이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절대 도산할 기업을 구제하지 말라고 한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수많은 은행, 모기지 회사, 기업들을 살리려고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고 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지난해 말 미국의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서방시각 위주의 결정권을 가진 국제통화기금(IMF) 운영 시스템을 개혁하고자하는 기싸움도 치열하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IMF의 재원을 5000억 달러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과 EU는 최근 각각 1000억달러, 750억달러의 기금을 출연하겠다고 밝혔으며, 왕치산(王岐山) 중국 부총리 역시 중국은 IMF의 재원 조달을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인도를 비롯한 신흥 강국들은 IMF 재원 출연 비중이 높아지는 만큼 서방국가에 편향된 의사결정권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IMF의 정책 결정권 비중을 보면 EU 회원국들이 전체 투표권의 32%, 미국이 17%를 차지하는 반면 중국의 영향력은 3.7%, 인도는 1.9%에 불과한 상태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29일자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경제위기는 미국 브랜드를 망쳐버렸고, 세계는 미국이 어떤 경제정책을 시행하라고 지시하는 강의를 더이상 가만히 앉아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미 MIT 대학의 사이먼 존슨 교수는 미국과 유럽이 '세계 경제의 구원' 논의를 주도하게 되는 것은 이번 회담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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