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에 영혼 판 월街의 물리학자들

  • 입력 2009년 3월 11일 03시 04분


복잡한 고위험 파생금융상품 개발 스타로 부상

최근 ‘버블 생산자’ 비난에도 지원자는 이어져

“과학에서 몇 % 차이는 노벨상 수상 아니면 조롱거리를 의미하지만 월가에서 이 같은 차이는 교도소에 가느냐, 아니면 카리브 해에 개인 별장을 갖게 되느냐를 결정한다.”

컬럼비아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1985년 월가행을 선택한 이매뉴얼 더먼 씨는 과학계와 월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월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은 자연과학을 버리고 돈 버는 직업을 택했다는 점 때문에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악마에게 영혼을 판 과학자’라고도 말한다.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학계를 떠나 월가로 향하는 과학자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10일 보도했다.

현재 월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 ‘양으로 계산하는(quantitative)’ 금융을 다룬다고 해서 ‘퀀트(quant·금융시장분석가)’로 불리기도 한다.

물리학 지식을 십분 활용해 이윤이 나는 복잡한 금융상품을 개발한 공을 인정받아 골드만삭스에서 고위 임원직에 오른 스타도 등장했다.

최근 증시 폭락으로 월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앤드루 로 교수(금융공학)는 “증시 폭락은 월가에 물리학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며 “월가의 물리학자는 현재 부족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가을 MIT에서 열린 퀀트 설명회에서는 ‘월가 물리학자’를 지망하는 학생들로 큰 강의실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물리학자들의 월가 진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후반. 1957년 옛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이후 급증했던 과학 예산이 크게 줄어든 데다 1960년대 졸업생들이 이미 대학의 연구직을 차지해 이후 졸업한 물리학 전공자들은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퀀트 인재들이 월가에 유입되면서 복잡하고 위험도가 높은 금융상품이 개발됐고, 주가가 하락해도 돈을 버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됐다고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월가를 선택한 물리학자들은 대박의 가능성과 함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퀀트가 되면 대체로 연간 7만5000∼25만 달러를 벌 수 있지만 실적이 부진하면 바로 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MIT를 졸업한 한 퀀트는 “월가는 박사를 원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똑똑하면서도 부자가 되려는 강한 욕망이 있는 사람을 바란다”고 말했다.

물리학 지식으로 무장한 퀀트들이 모호한 파생상품을 개발해 엄청난 거품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잘못된 경영 판단이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항변한다. 중개인의 잘못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동안 자신들이야말로 금융상품의 오류를 지적하는 최일선에 있었다고 반박한다.

‘금융과 사랑에 빠진 퀀트’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한다. 한 여성 퀀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금융 분야를 좋아하지 못하고, 여전히 물리학에 향수를 느끼는 퀀트가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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