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 왜곡보도 악순환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인터넷서 과장 → 주류 언론 확대 재생산 → 다시 인터넷

선거일을 50일도 채 남기지 않은 미국 대선이 갈수록 격렬한 '말의 공방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이전 선거 때와 달리 두드러지는 현상은 인터넷언론을 자칭하는 사이트들의 과장·말비틀기식 보도가 난무하고 이를 주요 방송과 신문들이 확대 전달하는 것이다.

'인터넷→주류 언론→다시 인터넷' 등 몇 단계를 거치면서 후보 진영의 말이 당초 의도나 문맥과는 달리 침소봉대되거나 비틀어지는 악순환의 사이클이 작동하고 있다.

16일 미국 주요 방송들은 "매케인 참모도 '매케인과 페일린은 대기업을 경영할 경험이 없다'고 인정했다", "매케인이 블랙베리를 발명했다고 매케인 측이 주장했다"는 뉴스를 계속 내보냈다.

▽경영능력 논쟁=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의 주요 참모인 칼리 피오리나 전 HP 최고경영자(CEO)는 16일 세인트루이스의 한 지방방송 인터뷰에서 "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가 대기업을 경영할 만한 경험이 있다고 보나?"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세라는 기업 경영을 하겠다고 출마한 게 아니다. 기업 경영은 다른 일"이라고 답변했다.

이를 모니터한 리버럴 인터넷 언론인 허핑턴포스트는 "매케인의 핵심 참모가 '페일린은 대기업을 경영할 만한 경험이 없다'고 고백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주요 방송들도 허핑턴포스트를 인용해 비슷한 제목의 보도를 계속 내보냈다.

피오리나 씨는 견디다 못해 MSNBC 방송과 인터뷰를 갖고 "매케인도, 오바마도, 바이든도 대기업을 경영할 경험을 갖췄다고 생각지 않는다. 기업을 경영하려면 비즈니스에 평생 몸담아야 한다.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은 다른 것이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나 CBS방송 등 일부 언론들은 이 발언에서도 앞부분의 매케인 대목만 따서 "매케인 참모, '매케인과 페일린은 기업을 경영할만한 경험이 없다'고 인정"식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블랙베리 논쟁=매케인의 한 참모는 16일 기자들과 경제위기에 대해 토론하다가 매케인 후보의 상원 상무위원회 경력을 거론하며 그가 경제를 다뤄온 경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매케인이 위원회에서 이룬 업적을 예로 들어 달라'는 질문에 그 참모는 "미국에서 정보통신은 15년간 눈부신 혁신을 해왔는데 정보통신 정책은 상무위원회를 거친다. 매케인은 정보통신 규제와 규제완화를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블랙베리 폰(e메일 송수신 등 인터넷 기능을 갖춘 휴대전화)을 들어 보이며 "이게 매케인이 만드는 걸 도운 거다"라고 말했다.

농담반으로 과장된 표현을 썼지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의회의 규제완화에 힘입어 정보통신 사업이 발달한 결과 블랙베리 같은 첨단 기술이 보편화됐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상당수 미국 언론들은 "매케인 참모, '매케인이 블랙베리폰 창조' 주장"이란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했다.

오바마 캠프는 성명을 내고 "'경제의 펀더멘탈이 튼튼하다'는 어제 발언만 아니었다면 금주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발언으로 꼽힐 것"이라고 비난했다.

▽정론지들도 인터넷 루머 확산에 가담=뉴욕타임스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한참 진행 중인 2일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내정된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한때 알래스카 독립당(AIP) 당원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런 주장의 진원지는 인터넷이었다.

부통령 후보지명 수락연설을 하루 앞둔 시점에 터져 나온 이런 주장에 대해 공화당은 페일린 후보의 공화당원 증명서 사본까지 공개하면서 '결백'을 증명했다.

뉴욕타임스는 하루 만인 3일 AIP 간부의 말을 인용, "당원 명부를 확인해 본 결과 페일린이 당원이었다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며 오보를 시인했다.

상당수 미국 언론들이 보도한 "매케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이라크와 '100년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내용 역시 거두절미식 보도의 전형이었다. 당시 매케인 후보는 미국이 일본과 독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상황과 이라크 상황을 비교한 뒤 "이라크가 평화를 되찾고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평화유지군으로 주둔을 고려할 수도 있다"고 말했으나 이게 100년 전쟁 식으로 보도됐다.

인터넷의 루머가 주류 언론에 보도되면서 받는 피해는 오바마 후보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일부 언론들은 6월 "오바마 후보의 부인 미셸 씨가 시카고의 한 교회를 찾아가 연설하던 도중 백인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화이티(whitey)'라는 용어를 썼으며 이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있다"는 인터넷 괴담을 "그런 내용이 인터넷에 떠돌아 오바마 측이 반박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루머의 내용을 전달해준 셈이다.

오바마 후보는 아예 '중상모략과의 전쟁(www.fightthesmears.com)'이란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자신이 코란에 선서한 과격 이슬람교도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루머와 싸우고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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