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총성 없이 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7월 4일 02시 58분



콜롬비아軍, 6년 피랍 베탕쿠르 ‘영화 같은’ 구출작전… 허찔린 반군 치명타

좌익 게릴라 조직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돼 6년여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혀 있던 잉그리드 베탕쿠르(46) 전 콜롬비아 대통령 후보와 미국인 3명, 콜롬비아 군인과 경찰 등 모두 15명이 2일 콜롬비아군의 극적인 구출작전으로 풀려났다.

베탕쿠르 씨와 미국인 인질은 FARC가 콜롬비아 정부에 체포된 동료 수감자 수백 명과 맞교환하려던 ‘정치적 인질’이었다. 따라서 이번 구출작전으로 FARC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치명타를 입게 됐다.

○ 군 요원들, NGO 신분 위장 반군에 접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3일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국방장관의 말을 인용해 ‘총알 한 방 쏘지 않고 게릴라를 속여 성취한 대담한 헬기 구출작전’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다.

콜롬비아군 정보요원들은 몇 달 전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로 위장해 게릴라의 최고 지도부로 잠입했다. 최고위층과 친분을 쌓은 정보요원들은 인질을 FARC의 신임 최고사령관 알폰소 카노에게 데려갈 것이라고 인질을 담당한 지역사령관을 속였다.

세 그룹으로 나뉜 인질 15명은 2일 새벽 손발이 묶인 상태로 MI-17 헬기가 기다리는 접선 장소인 남부 과비아레 밀림으로 옮겨졌다.

베탕쿠르 씨는 반군들이 ‘국제적 임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인질 교환이 성사됐다고 생각했지만 헬기 외부에 적십자 표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낙심했다. 게다가 승무원 일부가 좌익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상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것을 보고 단지 다른 곳으로 이송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발전기 이상 무(無)’라는 암호문을 사용한 뒤 헬기를 이륙시켰다. 이륙 직후 요원들은 인질들과 함께 헬기에 올라탄 FARC의 감시원 3명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제야 조종석에 앉은 한 특수부대원이 “우리 모두 정부군입니다. 당신들 모두는 자유입니다”라고 말했다. 베탕쿠르 씨는 “우리가 기쁨에 겨워 팔짝팔짝 뛰고 소리치는 바람에 헬기가 잠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고 IHT는 전했다.

헬기가 지상에 머문 시간은 22분. 반군 60여 명을 따돌리고 구출작전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30분도 되지 않았다.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이번 구출작전 암호명은 스페인어로 ‘하케(Jaque)’였다. 서양장기에서 체크(Check·장군), 즉 ‘외통수’인 셈이다.

이번 작전은 FARC가 2002년 정부군으로 위장해 칼리 지역에서 의원 13명을 납치했던 작전을 역으로 구사한 것이었다. 뉴욕타임스는 3일 “콜롬비아군은 FARC의 2002년 작전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미국도 작전 수립 및 전개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 베탕쿠르 “억류된 인질 석방 위해 노력할 것”

베탕쿠르 씨의 전남편인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딸 멜라니(22) 씨와 아들 로랑조(19) 씨는 어머니의 석방 소식을 듣자마자 보고타로 찾아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베탕쿠르 씨는 상봉 직후 보고타 공항 활주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열반, 천국이 있다면 지금 내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며 감격했고 멜라니 씨는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내내 아이들이 아름답게 성장했다고 되풀이하며 키스를 퍼붓던 베탕쿠르 씨는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직도 억류된 인질들의 자유를 위해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을 비롯한 남미의 모든 지도자와 함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을 위한 국가연합체 구상에 우리 모두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베탕쿠르 씨는 자녀들과 4일 프랑스를 방문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석방을 위해 애써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할 것이라고 AP통신이 전했다.

대선 공약으로 그의 석방을 내세웠던 사르코지 대통령은 “6년간의 악몽이 끝났다”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지도자들도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 최고가 인질 놓친 FARC 최대 위기

가장 ‘값비싼’ 인질이던 베탕쿠르 씨를 놓친 FARC는 창설 44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번 작전 성공을 계기로 반군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타임에 따르면 FARC는 10년 전만 해도 2만 명 규모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최근엔 1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특히 최근 몇 달간 FARC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속속 투항하고 3월에는 40년간 조직을 이끌던 최고지도자 마누엘 마룰란다가 사망하면서 급속히 세력이 약화됐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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