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대선, 美 역사의 뉴 챕터를 펼치다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5월 21일 03시 14분



노예해방… 세계대전 승리… 뉴 프런티어 정신…

美 역사 50여년마다 ‘변화의 비등점’으로 기록

‘오바마’ 젊은 세대 변화의 욕구 담긴 역사현상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본선의 벽을 넘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10년, 20년 뒤에 돌아보면 2008년의 ‘오바마 열풍’은 물밑에서 형성돼 온 변화의 흐름이 미국 사회에 새로운 장(章)을 열어준 시기로 규정될 수 있을 겁니다.”(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 교수·아태연구소장)

미국 민주당 대통령선거 경선 주자인 오바마 후보가 20일 실시된 오리건과 켄터키 주 경선에서 선출직 대의원 과반수를 확보했다. 후보 확정에 필요한 ‘매직넘버’(비선출직 슈퍼대의원을 포함한 전체 대의원의 과반수)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민심의 과반수를 얻었다’고 선언해도 좋을 이정표를 넘어선 것이다.

오바마 후보는 이날 저녁 아이오와 주에서 승리 축하 집회를 열고 자신이 민주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고 선언할 예정이다. 이 연설에는 요즘 거의 모든 연설에서 빠지지 않는 대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역사에는 새로운 세대를 부르는 시대적 요청이 있는 때가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요청을 받고 있으며 응답해야 할 때다. 미국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 ‘뉴 챕터(New Chapter·새로운 장)’를 써야 할 시간이 됐다.”

그의 말처럼 미국 역사는 수십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변화의 동력이 형성되는 특징을 보여 왔다. 동시대 사람들은 미처 감지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때가 뉴 챕터를 여는 변화의 비등점이었다”고 모두 동의하는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많은 정치, 역사 전문가들은 올해 대선이 뉴 챕터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국 역사의 뉴 챕터=조지아대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라슨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희년(禧年·jubilee)’이란 용어를 빌려 미국의 변화를 진단했다. 희년은 50년마다 채무를 면제해 주고 노예를 풀어주는 등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옛 히브리인들의 의식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는 미국 정치도 거의 50년마다 희년 같은 경험을 해 왔으며 올해가 그런 해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예를 들어 △토머스 제퍼슨이 귀족주의적 연방당원을 물리치고 민중의 지배 개념을 도입한 1800년 △1850년대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등장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1860년)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통령 취임과 일련의 개혁 정책 △1960년대 프런티어 정신을 주창한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과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등장 등이 그런 변화의 계기였다는 것.

신 교수는 “불과 40대 초반에 (상대적으로 소수파인) 가톨릭교도 출신인 케네디의 당선은 1960년대 당시 미국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의미가 있었다”며 “오바마 열풍도 인종, 성, 소수 문화에 유연하고 관용적인 새로운 세대가 미국의 변화를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정책자문역을 지낸 윌리엄 걸스턴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오바마 후보의 선거 테마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는 것”이라며 “지난 40년간의 분열의 정치를 단호히 반대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그의 호소에 대중이 호응했다”고 말했다.

▽뉴 챕터를 부르는 동력=전문가들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촉진하는 힘을 세 가지 축으로 설명한다.

먼저 바닥으로부터의 변화다. 특히 세대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문화와 시대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변화를 불가피하게 요구한다는 것.

걸스턴 연구원은 “오바마 열풍의 주역인 젊은 유권자들의 특징은 그들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인종적으로 다변화된 미국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학교 등에서 아시아, 유럽, 남미 이민자들과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면서 그런 변화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변화를 촉발하는 또 다른 요인은 기존 지배층의 실정(失政)이다. 라슨 교수에 따르면 △제퍼슨 시대 이전에는 전쟁과 혹정에 시달렸고 △루스벨트 시대 이전에는 부패와 스캔들이 횡행했으며 △케네디와 킹 목사 시대 이전에는 ‘매카시 선풍’과 인종차별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

현재의 오바마 열풍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 실패, 독단주의 외교정책, 경제난, 그리고 민주당을 포함한 기성 정치권 전체가 부패와 무능 이미지에 포위돼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도자 개인의 자질과 조건도 변화를 촉발하는 요인이다. 오바마 후보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나 하와이, 동남아에서 자랐으면서도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와 명문 대학을 거친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결합돼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새 챕터에는 어떤 내용 담길까▼

“美의 가치 중시하되 리더십 유연하게”

▽새로운 미국의 페이지는 어떤 내용물로 채워질까=현재 변화를 주도하는 젊은 세대는 미국적 가치와 성취를 중시하고 존중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거 1960, 70년대 유행하던 히피문화가 기존 제도권 전체를 거부했던 것과는 차이가 크게 난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올해 초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가 얽매였던) 베트남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로우며 대신 탈냉전과 9·11테러, 이라크전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변화 주도 세대가 바라는 새로운 미국의 방향으로 인종, 문화적으로 좀 더 포용적이며, 이념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중간지대로 모이는 사회상을 전망한다.

파시즘과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세대인 이들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국제화된 세계에서 자라났으며 지구 환경 문제에 민감하다. 그런 그들에게 부시 행정부 시절 전 세계에 만연한 반미 감정은 적잖은 상처가 됐다.

변화 주도 세력은 미국이 테러리즘에는 단호하되 독단주의 대신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중시하는 유연한 리더십을 지닌 국가로 이미지가 정립되길 갈구한다.

물론 본선에서 오바마 후보가 낙선하고 그 이유가 ‘인종의 벽’인 것으로 분석된다면 “그게 미국의 한계”라는 비판이 대두될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이번 민주당 경선은 물밑에서 비등점을 향해 끓고 있는 변화의 동력을 분명히 드러낸 역사적 이벤트였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다.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흑인 후보가 대선 승리 목전까지 달렸다는 점만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라며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오바마 현상은 미국 사회 내에서 두고두고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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