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민족주의 장벽’ 갈수록 높아진다

  • 입력 2008년 2월 26일 03시 01분


러-中-아르헨 등 “내수물량 확보… 돈 더 벌어도 수출 안해”

‘곡물 재고 최저→가격 급등→수출 규제 확대.’

지난해 하반기 이후 밀 옥수수 콩 등 주요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곡물 수출국들이 쌓아 올리는 규제의 장벽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 곡물 가격은 2월 초 사상 최고치에 달한 뒤 다시 신기록을 향해 요동치고 있다. 올해 수확량이 크게 늘지 않을 경우 가격 인상과 규제 확대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 일본 등 곡물 수입국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장 유엔식량계획(WFP)은 곡물 가격 급등에 따른 예산 압박 때문에 빈국에 대한 식량 원조를 제한하는 방안을 수립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25일 보도했다.

○ 수입국들 “연쇄 곡물파동 우려”

세계 5대 밀(소맥) 수출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지난주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주변국에 대해 4월 30일까지 밀 금수 조치를 내렸다.

이들 나라가 관세가 낮은 점을 악용해 러시아산 밀을 수입한 뒤 제3국으로 되팔고 있어 이 같은 조치가 필요했다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주장이다.

이에 앞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해외에 판매되는 밀에 원가의 30∼40%에 이르는 수출세를 물려 왔다.

러시아가 이처럼 내수 물량 비축과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수출 규제를 계속 확대하는 것은 국제 밀 가격을 끌어올리는 주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중국과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규제를 통해 수출 물량을 억제하고 있다.

중국은 올해부터 1년간 밀 쌀 옥수수에 대해 수출 쿼터제 및 수출관세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밀 쌀 옥수수에 대해 수출 금액의 13%를 환급해 주던 세제 혜택도 지난해 12월 전격 폐지했다.

세계 네 번째 밀 수출국인 아르헨티나는 2월 초 월간 밀 수출량을 40만 t 미만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규제를 부활했다. 지난해 말 밀 작황이 좋지 않아 내수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러시아 농산물 가격 분석가인 이고리 파벤스키 씨는 “미국을 제외한 주요 곡물 수출국들이 수출 신고제도, 수출세 인상, 수출 물량 제한, 수출 금지 등 각종 규제를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곡물 가격이 올라가면 수출을 늘리는 것이 정상인데도 상당수 수출국이 자국 물가 안정과 식량 안보라는 정치 논리를 들어 곡물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곡물 수입국들은 연쇄적인 곡물 파동을 우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난해 밀 수입량을 연간 10만 t에서 60만 t으로 6배 늘렸다. 이 나라는 가뭄과 홍수로 밀 수확량이 줄어든 데다 시장 방출용 밀도 바닥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밀을 수입해 온 이집트 루마니아도 식량 부족 사태에 대비해 수입처를 새로 찾고 있다.

○ 1년 새 콩 83% 옥수수 27% 값 올라

주요 곡물 수출국들의 수출 규제는 2월 국제 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는 3월 인도분 밀 가격이 8일 사상 최고치인 부셸(약 27.2kg)당 10.93달러까지 올랐다. 밀 선물가격은 22일 10.49달러로 약간 내렸지만 지난해 상반기의 두 배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콩 값도 2월 6일 부셸당 13.73달러로 최고 기록을 갈아 치웠고 옥수수 가격 역시 사상 최고치인 부셸당 5.29달러를 돌파했다. 두 농작물의 가격은 각각 1년 전보다 83%, 27%씩 올랐다. 콩과 옥수수의 가격도 조정을 거치고 있지만 앞으로 더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최근 밀 가격 상승을 부채질하는 가장 큰 요인은 세계 최대 생산국인 미국의 밀 재고량 감소. 미 농무부에 따르면 미국의 밀 재고량은 1년 전보다 40% 줄어 1948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 “6월께 값 하락” “계속 상승” 전망 엇갈려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 개발도상국의 소비 증가, 호주 등 곡물 수출국의 기상 이변, 콩과 옥수수의 바이오에너지 수요 증가도 가격 상승의 원인으로 꼽힌다.

식량 전문가들은 “러시아와 아르헨티나 중국의 곡물 수출 규제가 미국의 곡물 재고량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등이 곡물 수출을 제한하자 미국은 지난해 하반기 수출을 크게 늘렸다. 지난해 3분기 미국의 밀 수출 실적은 1984년 이후 분기별 집계에서 최고를 나타냈다.

요동치는 곡물 가격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엇갈린다. 북아메리카위기관리연구소의 제리 지델 연구원은 “올해 수확량이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되면 6월경 곡물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자크 디우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은 “곡물 가격 상승이 앞으로 10년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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