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3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시켰다.
경찰은 비상사태 선포 하루 만에 야당 지도자와 반체제 인사 500여 명을 체포했다. 국영 파키스탄TV를 제외한 모든 방송이 금지됐고 4일 오전까지는 전화도 대부분 불통됐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선 군인들이 대법원을 봉쇄하고 주요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제2의 쿠데타” “사실상의 계엄령”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번 조치로 파키스탄의 정정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들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3일 TV 연설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으로 나라가 위험에 처했고 법원이 공무원들을 잇달아 처벌함에 따라 정부가 반쯤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비상사태 선포의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재선이 적법한지를 따지는 대법원의 판결이 임박하자 아예 대법원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내린 조치라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임시헌법명령’을 동원해 대법원 심리를 재개함으로써 자신의 재선을 합헌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아졌다.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거는 실시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샤우카트 아지즈 총리는 4일 “국가비상사태 상황에선 선거가 최대 1년까지 연기될 수 있다”고 말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이에 따라 총선을 계기로 무샤라프 대통령과 ‘권력 분점’을 이뤄 정치를 재개하려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희망도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커졌다. 두바이를 방문했던 부토 전 총리는 3일 급거 귀국해 “파키스탄 역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영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비상사태 선포를 일제히 비난했다. 터키를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미국은 비헌법적인 조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체포된 초드리 대법원장은
▼헌법 근거로 무샤라프와 사사건건 대립
해임→복직 과정서 민주화 상징 인물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대립한 것은 올해 3월 무샤라프 대통령이 초드리 대법원장을 직권 남용 등을 이유로 해임하면서부터. 이에 앞서 초드리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독재와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며 헌법을 근거로 사사건건 맞서 왔다.
당시 파키스탄변호사협회는 재판을 거부하고 항의 시위를 벌여 정부를 압박했다. 시위는 야당 의원과 지역 원로들이 합류하는 등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됐다.
초드리 대법원장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며 “해임은 헌법을 위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5월엔 카라치에서 대법원장 해임을 둘러싼 여야 지지세력 간의 유혈충돌로 4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달 6일 대선에서 압승했지만 초드리 대법원장이 주도하는 대법원은 선거 결과 공표를 유예토록 했다. 야당 측이 대통령의 출마 자격 유무를 두고 제출한 헌법소원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대법원은 당초 5, 6일경 헌법소원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야당 측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결국 대법원이 자신의 재선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이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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