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호령하던 日 전자업계“구조조정 없인 영원한 1등없다”

  • 입력 2007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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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시내 가전양판점의 평판TV 매장.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던 일본 전자업체들은 과당 경쟁으로 인한 출혈 판매 등으로 수익이 악화되면서 구조조정의 찬바람에 휩싸였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일본 도쿄 시내 가전양판점의 평판TV 매장.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던 일본 전자업체들은 과당 경쟁으로 인한 출혈 판매 등으로 수익이 악화되면서 구조조정의 찬바람에 휩싸였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전후 최장(最長) 호황과 기록적인 엔화 약세의 혜택을 동시에 만끽 중인 일본. 이달 말 결산을 앞둔 많은 기업의 내부에선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경상이익이 4년 연속 사상 최고를 경신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 그러나 자동차와 함께 일본의 고도성장을 견인해 온 전자업계는 봄볕 대신 구조조정의 매서운 칼바람에 휩싸였다. 반도체 가전 휴대전화기를 위시한 주력 제품의 수익 창출력이 곤두박질치면서 1990년대까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위세는 아련한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일본의 전자산업은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벤치마킹해 온 선행 모델. 반도체와 휴대전화 부문의 수익률 저하로 한국도 ‘4∼6년 뒤에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것’이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경고를 떠올린다면 일본의 이런 모습은 한국 전자업계의 ‘미리 보는 자화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일본 전자산업 추락의 실상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끝없는 감원과 매각

일본의 전자업체 중 구조조정의 최고 모범생으로 꼽히는 기업은 2000년 6월 이후 ‘창업자의 경영이념 외에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과감한 개혁으로 경쟁력을 회복한 마쓰시타전기. 그러나 이런 마쓰시타전기조차도 6월 말까지 희망퇴직을 통해 5000명을 줄이기로 했다고 아사히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마쓰시타전기는 2001년 이후 5년간 2만5000명을 감원한 바 있다.

마쓰시타전기는 음향 및 영상기기로 유명한 자회사 일본빅터(JVC)도 이번 달 안에 미국 투자펀드에 매각할 예정이다.

일본빅터는 가정용 비디오의 표준인 VHS 방식을 개발해 베타맥스 방식의 소니를 눌렀던 ‘기술 강자(强者)’로 이름 높다. 1976년 VHS를 발매한 이후 6년간 매출을 6배로 늘린 신화는 지금도 업계에서 널리 회자된다. 그러나 VHS의 성공에 도취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이 회사는 급기야 마쓰시타전기의 품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됐다.

히타치제작소는 소형 모터를 제조하는 상장 자회사 저팬서보를 5000억 엔에 일본전산에 매각하기로 했다. 히타치제작소가 상장 자회사를 파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히타치제작소는 2010년까지 900여 개에 이르는 자회사 중 20%가량을 줄이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산요전기도 자회사인 산요반도체의 매각 교섭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서 싹튼 위기

일본 전자산업계가 가장 뼈아파하는 것은 전자산업의 토대인 반도체가 무너졌다는 사실. 일본 반도체산업은 1987년 세계 매출 순위 1∼3위를 싹쓸이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위기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일본의 강세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국방부가 나서 업체들과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통상법 301조를 동원해 일본의 안방을 집중 공략했다.

기술 우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견제에 걸려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반면 D램 등 메모리 부문은 삼성전자 등 후발주자에 시장을 급속히 넘겨줬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일본 반도체산업의 현실은 1983년부터 10년 연속 세계반도체 매출 수위를 달렸던 NEC의 처지가 단적으로 보여 준다. NEC가 반도체를 따로 떼어내 설립한 자회사 NEC일렉트로닉스의 나카시마 도시오(中島俊雄) 사장은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에서 “본사의 경영은 진짜 위기”라며 말문을 뗀 뒤 국내 생산라인을 9개에서 4개로 축소하는 것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감량 경영 대책을 발표했다.

○달라진 일본 기업들

일본 전자업체들이 비록 과거의 명성은 잃었지만 언제까지나 실패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승부처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더구나 일본 전자업체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면서 ‘잃을 것이 두려워 앞뒤를 재던’ 옛날의 모습을 버린 지 오래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일 전자업체 간에 소모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뜨거운 승부가 진행 중인 미국의 평판 TV(PDP 및 LCD TV) 시장. 일본의 경제전문지인 주간 도요게이자이에 따르면 샤프가 지난해 가을 미국에서 발표한 액정표시장치(LCD) TV 신모델은 광택감 있는 검은 몸체에 가는 틀이 특징인 삼성의 모델을 베끼다시피 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자세다.

투지도 무모하다 싶을 정도다. 1년 사이에 가격이 반으로 떨어질 정도로 가격 경쟁이 심한 평판 TV 시장은 많은 전자업체의 생존을 위협하며 상당수 업체를 ‘무덤’으로 밀어 넣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일본 업체들은 도박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설비투자를 망설임 없이 감행할 태세다.

지금까지 3800억 엔을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 사업에 투입해 온 마쓰시타전기는 최근 새로 2800억 엔을 쏟아 부어 세계 최대 규모의 PDP 공장을 짓기로 했다.

LCD TV에 약 5150억 엔을 투자한 샤프도 2000억 엔을 들여 생산라인을 확장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대부분의 일본 전자업체들이 한결같이 소리 높여 ‘타도 삼성’을 외치고 있다. 저임경쟁력을 자랑하는 중국 기업들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술력에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업체들까지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대열에 가세한 형국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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