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미니기업가다]<16>대만 ‘탑파워’

  • 입력 2007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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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파워서플라이를 만드는 PC 부품 제조업체 탑파워의 저우칭린 사장이 유럽 수출용 파워서플라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PC를 직접 조립하는 마니아 계층이 많아 성능만 좋다면 값비싼 파워서플라이도 잘 팔린다. 탑파워는 세계 최고의 기술로 이런 틈새시장을 개척했다. 타이베이=김상훈  기자
고급 파워서플라이를 만드는 PC 부품 제조업체 탑파워의 저우칭린 사장이 유럽 수출용 파워서플라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PC를 직접 조립하는 마니아 계층이 많아 성능만 좋다면 값비싼 파워서플라이도 잘 팔린다. 탑파워는 세계 최고의 기술로 이런 틈새시장을 개척했다. 타이베이=김상훈 기자
대만 타이베이의 탑파워 본사에는 공장이 없다. 본사에서는 연구개발과 영업만 담당하고 제조는 모두 중국 협력업체에서 이뤄진다. 중국의 탑파워 협력업체 제조공장. 사진 제공 탑파워
대만 타이베이의 탑파워 본사에는 공장이 없다. 본사에서는 연구개발과 영업만 담당하고 제조는 모두 중국 협력업체에서 이뤄진다. 중국의 탑파워 협력업체 제조공장. 사진 제공 탑파워
“소리를 들어보세요.”

“무슨 소리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대만 개인용 컴퓨터(PC) 부품 제조업체 탑파워의 저우칭린(周靑麟) 사장은 파란색 불을 가리켰다.

“여기 전원이 들어왔다는 파란 불 보이죠? 이 파워서플라이는 지금 작동 중이에요. 소리가 안 들리세요?”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제야 ‘윙’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파워서플라이는 PC에 전원을 공급하는 장치다. PC를 열어 보면 뒤편에 전선을 꽂을 수 있는 사각형 상자가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파워서플라이다.

컴퓨터 소음의 대부분이 이 장치에서 생긴다. 하지만 탑파워는 자체 기술로 열이 덜 생기게 해 팬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어야 겨우 들릴 정도까지 줄였다.

○누구도 만들지 않은 제품을 만든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臺北) 시 외곽의 작은 공업단지. 똑같이 생긴 사각형 건물이 줄지어 있어 탑파워 본사가 위치한 ‘7번 빌딩’을 찾는 데 한참 걸렸다. 회사는 7번 빌딩의 7층에 있다. 워낙 건물이 낡아 겉보기에는 그저 작은 가내수공업 공장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회사 안에는 생산설비가 없었다. 제품 생산은 중국의 협력업체가 하고 대만 본사는 영업과 기술개발만 맡는다.

직원 수는 50명. 하지만 연간 매출액은 2005년 기준으로 9억 대만달러(약 255억 원)에 이른다. 영업이익은 1억7900만 대만달러. 영업이익률이 19.8%이니 제품을 1만 원어치 팔면 2000원이나 남기는 셈이다.

이처럼 탑파워가 경쟁업체에 비해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남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은 고급 파워서플라이를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PC는 성능이 크게 높아져 중앙처리장치(CPU)와 비디오카드 등 PC 부품들에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 이때 용량이 크고 안정적인 파워서플라이가 필수적인데 탑파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량의 파워서플라이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파워서플라이의 용량은 300∼400W급. 하지만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이미 1200W 제품을 만들었고, 다음 달에는 1600W 제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소음도 적고 용량도 크니 금상첨화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일반적인 파워서플라이의 가격은 약 5만∼8만 원. 하지만 탑파워 제품 가운데에는 30만 원이 넘는 제품도 많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가격경쟁력이 전혀 없어 탑파워가 처음 고급 파워서플라이를 만들자 업계에서는 이를 잘못된 선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비자는 달랐다. 이들은 높은 용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소음도 적은 새로운 파워서플라이에 기꺼이 비싼 값을 지불했다.

○명확한 타깃 시장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탑파워는 미국과 일본, 독일과 영국을 타깃 시장으로 정하고 이들 나라의 컴퓨터 전문지가 시도하는 성능 평가마다 참여했다. 그러자 ‘값은 비싸지만 성능만은 최고’라는 평가가 나왔다.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는 대기업이 만들어 파는 PC 대신 자신만의 최고급 PC를 만들려는 마니아 계층이 많았다. 전문지 성능 평가에서 호평을 받자 이 마니아 계층이 탑파워 제품에 관심을 보였다.

이와 함께 반도체 업체인 인텔과 AMD, 그래픽카드 업체인 엔비디아와 ATI 등에서 인증을 받는 데도 성공했다. ‘탑파워의 파워서플라이는 우리 회사의 최고급 제품에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 준다’는 인증이었다.

이 회사들이 만드는 CPU와 비디오카드는 고급품일수록 전기를 많이 소모했다. 이들로서도 탑파워와 같은 고(高)용량 파워서플라이 전문 제조업체가 파트너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자 회사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탑파워가 노리는 고객층은 전체 PC 사용자의 1%도 안 되는 고급 사용자들. 하지만 탑파워는 이 작은 시장에서만큼은 최고로 인정받았다. 유럽의 고급 PC 사용자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은 70%에 이른다.

○기술은 회사의 것

처음부터 탑파워가 이런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생긴 것은 1986년. PC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27세의 기계공학도였던 저우 사장은 골방에서 석 달 동안 밤을 새워 가며 파워서플라이 3개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제품을 들고 직접 바이어를 찾아다녔다. 자본금 25만 대만달러(약 711만 원)를 들여 세운 회사는 예상보다 더 빨리 성장했다. PC 산업의 태동기였기 때문.

하지만 10년 뒤 PC 산업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다. 파워서플라이 업체들 간에 가격경쟁이 벌어지면서 이익이 점점 줄었다.

저우 사장은 1999년 승부수를 던졌다. 직원들에게 고급형 파워서플라이를 만들자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처음 창업을 하던 때처럼 엔지니어들과 함께 밤을 새워 가며 신기술을 개발했다. 이때부터 탑파워가 만들어낸 저소음 고용량 파워서플라이 관련 신기술 73종은 모두 대만, 미국, 일본, 독일 등에 특허 출원됐다. 이 회사는 1999년부터 8년 동안 특허관리비로만 모두 6000만 대만달러(약 17억 원)를 썼다.

저우 사장은 “기술을 특허로 관리하지 않으면 기술자가 이직할 때마다 기술이 빠져나간다”며 “난 사장이지만 나도 기술을 갖고 나갈 수 없다. 기술은 회사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 중소기업 경쟁력, 일류기업 외면한 ‘틈새’ 뚫고…독보적 기술로 ‘특색’ 키우고

“여러분의 한계를 아셔야 합니다.”

1999년 6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대만 타이베이를 찾았다.

탑파워의 저우칭린 사장은 뒷줄에서 강연을 듣다가 깜짝 놀랐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저 갑갑하고 풀리지 않는 경영 현실에 대해 아이디어나 구해 보려고 찾아간 강연이었지만 그는 이날 용기를 얻었다.

당시 탑파워는 개인용 컴퓨터(PC)를 만드는 대만 제조업체들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파워서플라이를 납품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는 게 없었다. 세계적인 PC산업의 불황으로 가격 경쟁이 극심해졌기 때문이었다.

포터 교수는 “자신만의 특색으로 경쟁을 한다면 대만 업체도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우 사장은 당장 고급 파워서플라이 제작을 시작했다. PC의 소음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워서플라이의 소음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주위에선 ‘PC 값을 올려놓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소신대로 밀어붙였다. 작은 대만 업체가 살아남으려면 남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시장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KOTRA 타이베이 무역관의 옥영재 관장은 “이것이 대만 중소기업의 경쟁력”이라며 “이들은 미국과 일본, 한국의 일류 기업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틈새 제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는 실용적인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대만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신주공업단지의 황칭밍(黃慶銘) 과장은 ‘대만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이팟 MP3플레이어는 미국이 설계한다. 첨단 플래시메모리는 한국이 설계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대만이다.”

타이베이=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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