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日보통사람들의 직업의식

  • 입력 2007년 1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연말연시 우연히 만났던 두 일본인의 얼굴이 긴 잔상(殘像)을 남긴다. 한 사람은 택시운전사, 또 다른 한 사람은 식당 주인이다. 일상 속에서 수없이 스치게 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도쿄(東京) 롯폰기(六本木)에서 지인들과의 송년 모임을 마친 뒤 밤늦게 택시를 탔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운전사는 유난히 사근사근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택시는 금방 집까지 1km가량을 남겨 둔 요쓰야(四谷) 3정목(丁目)에 이르렀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자 그가 차를 멈추면서 요금계산기 정지 단추를 눌렀다. 아무래도 그가 목적지를 착각한 것 같아서 “우리 집은 여기에서 조금 더 가야 한다”고 알려 줬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손님이 길을 건너서 택시를 잡았으면 지금 온 길보다 가까운 길로 왔을 겁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면서 손님을 태웠기 때문에 요금을 깎아 드리는 게 맞습니다. 손님이 반대편에서 타는 바람에 돌아온 거리와, 여기서부터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비슷할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택시를 잡은 이쪽의 책임이 더 큰데도 먼저 요금을 깎아 주겠다는 그의 선량한 고지식함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있는 스테이크 전문 식당 ‘마코토(誠)’를 찾아간 것은 해가 바뀐 지난주의 일이다. 미식(美食) 전문 웹사이트에서 주소를 미리 손에 넣었지만 그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큰길에서 벗어난 골목 안에 자리를 잡은 데다 간판은 고사하고 식당임을 알려 주는 어떤 표지도 없었다. 마침 흰 가운을 입은 종업원이 숯불을 갈기 위해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수십 번이라도 그냥 지나칠 만한 곳이었다.

마코토는 1층에 10석, 2층에 12석으로 좌석이 22개뿐인 아담한 식당이지만 스테이크의 질과 맛은 정평이 나 있어서 미식가들이 주 고객이다. 단골손님 가운데는 유명 TV 사회자를 비롯한 명사도 많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스테이크에 곁들일 고급 와인을 찾는 손님이 적지 않다. 하지만 마코토의 주인 다카야마 마사요시(高山正義) 씨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고 한다.

“저희 집의 메인(주 요리)은 스테이크입니다. 스테이크보다 비싼 술은 팔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간판과 메뉴가 없는 이유를 물어봤다.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좋은 요리를 내놓으면 간판과 메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순간 그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택시운전사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다카야마 씨가 보여 준 자신감과 이름 모를 택시운전사가 보여 준 고지식함, 즉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직업윤리의 뿌리는 하나라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문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은 시점에 나 자신의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되돌아볼 기회를 준 그들과의 만남이 한없이 고마웠다.

연말연시를 도쿄가 아닌 서울에서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얼굴과 직업은 다르지만 도쿄의 택시운전사와 식당 주인보다 몇 배나 훌륭한 분들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과연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솟는 집값 때문에 “가게 차리지 말고 차라리 집이나 사둘걸”이라고 후회하는 자영업자가 많다는 뉴스, 현대자동차 노조가 “약속한 성과급을 내놓으라”며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연초부터 분말소화기를 분사했다는 국내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그런 의구심을 지워 내기가 어려웠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