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미국의 ‘윗물’은 다 그렇다?

  • 입력 2006년 11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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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국 워싱턴에선 경찰과 관련된 두 가지 뉴스가 시민들의 화제가 됐다.

첫 번째는 3800여 명의 경찰관을 통솔할 워싱턴 경찰청의 새 청장에 39세의 ‘싱글맘’인 캐시 레이니어 씨가 임명됐다는 소식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임신해 학교를 중퇴한 ‘문제 소녀’였다는 개인사가 양념처럼 눈길을 끌었다. 아이를 낳은 지 2년 뒤 이혼한 레이니어 씨는 역시 이혼녀인 어머니가 홀로 2남 1녀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걸 깨닫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아이를 키우며 검정시험으로 고교 졸업 자격증을 따고 인쇄소 등에서 일하다 일선 순찰 경관이 됐다. 스스로 ‘중독됐다’고 말할 만큼 일을 사랑한 레이니어 씨는 오전 1시 반까지 일하는 성실성과 동료들을 따뜻하게 휘감는 통솔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16년 만에 세계의 수도로 불리는 워싱턴의 치안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뉴스는 뉴욕타임스의 베테랑 기자였던 데이비드 로젠바움 씨의 유족이 워싱턴 경찰 당국 등을 상대로 20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는 어두운 뉴스 때문에 조금 빛이 바래 버렸다.

로젠바움 씨는 올 1월 6일 저녁식사 후 워싱턴 시내 서북부의 주택가를 산책하다 강도에게 파이프로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지나던 행인이 발견해 신고했지만 구급 요원들은 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로젠바움 씨를 취객으로 간주했다.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었지만 3.6km나 더 먼 병원으로 그를 옮겼다. 구급 요원이 그 병원 근처에 개인적 볼일이 있었던 것이다.

응급실 간호사도 ‘취객 환자’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머리의 상처를 발견하고 뇌신경외과 의사들을 부른 것은 4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왕년에 의회 취재로 필명을 날렸던 전설적인 노 기자는 동틀 녘에야 수술실로 옮겨졌고 이튿날 숨졌다. 나중에 강도들을 붙잡아 추궁해 보니 이들은 달포 전에도 강도짓을 한 뒤 강탈한 휴대전화를 버젓이 사용했는데도 경찰은 피해신고를 책상 속에 묻어둔 채 통화명세 추적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두 뉴스가 미국사회의 단면을 보여 준다고 입을 모았다. 레이니어 씨의 성공스토리가 보여 주는 것처럼 미국은 연애하듯 일에 몰두하는 1%의 ‘일벌레’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이며, 이는 여전히 미국의 가장 큰 힘이다. 실제로 엘리트층으로 갈수록 ‘나인 투 파이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일에 몰두한다. 그 대신 사회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혀를 내두를 만큼 과감한 보상을 안겨 줬고, 그들은 여기에 엄격한 직업윤리로 보답해 왔다. 평범한 대중은 정해진 근무시간과 긴 여가를 누리지만 업무 도중에는 사적인 전화통화도 금기시할 만큼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시스템이 위아래 할 것 없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도층의 책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라크 주둔 미군의 한 끼 식사비용이 무려 36달러였다”고 한 친구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라크 미군을 위한 식당 운영업체는 딕 체니 부통령이 최고경영자(CEO)였던 회사다. 실력자를 등에 업은 기업에 특혜가 제공됐다는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전에 현역병으로 자녀를 보낸 현역 의원은 1명에 불과하다” “아버지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나자 입대를 자원했는데, 아들 부시는 베트남전 때 어디에 있었나”….

물론 과거에도 지도층의 도덕성이 비판받은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윗물은 다 그렇다’는 느낌을 준 적은 없었다고 한 친구는 말했다. 미국은 좋든 싫든 지도적 국가이고, 우리도 그 리더십에 영향을 받는다.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것을 보는 한국 기자의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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