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고이즈미-이오키베 모델

  • 입력 2006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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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보다 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모진 말 잘하기로 난형난제다. 적(敵)을 만들어 두들기는 정치수법도 닮았다. 다 역류(逆流)의 정치인이다.

작년 8월 일본 참의원은 고이즈미가 정권의 사활을 걸고 추진한 우정(郵政) 민영화를 부결시켜 버렸다. 고이즈미는 전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 카드로 맞섰다.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예상 못한 역습이었다.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가 옳은가 그른가’라며 선거를 지휘해 자민당 의석을 62%로 늘리는 압승을 거두었다.

노 대통령도 역발상, 역주행이 장기(長技)다. 야당들의 탄핵 공세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극해 2004년 총선에서 여당에 과반의석을 안겼다.

이처럼 비슷한 듯하지만 지금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에 대한 자국민의 평가에는 편차가 심하다(고이즈미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 악인 취급받는 것은 별개 문제다. 노 대통령의 북한 감싸기도 일본인들에겐 냉소거리다).

고이즈미는 이달 26일 퇴임한다.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후임으로 일찌감치 굳어졌다. 이렇게 ‘지는 해’인데도 지난달 하순 여론 조사에서 고이즈미 지지율은 47%(지지하지 않음 36%)였다. 그의 사전에는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이란 말이 없는 듯하다. 5년 5개월 재임기간 평균 지지율은 50%로 전후(戰後) 일본을 이끈 총리 25명 가운데 2위다.

임기가 1년 반 남은 노 대통령에 대한 10%대 지지율은 대통령 말마따나 국민의 희망 수준이 너무 높은 탓인가, 대통령 귀책사유가 더 큰가. 아무튼 고이즈미는 노 대통령과 다른 방식으로 ‘일본 국민에게 희망을 준 총리’가 됐다.

지난달 29일 일본 아와지 섬에서 열린 한일포럼에서 모기 유자부로 기코만 회장은 ‘고이즈미 시대’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부가 나서야 모든 게 해결되는 사회에서 민(民)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사회로 바뀌었다. 규제 완화, 민영화로 민간 활력을 활용하는 고이즈미 방식이 주효했다. 그 결과, 공공투자 없이 경제가 확대 기조로 돌아섰고 성장을 이룩했다. 정부가 행정 축소,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함으로써’ 오히려 잘됐다.” 노무현 노선과 철저하게 반대다.

그달 1일 일본 방위대 교장이 된 이오키베 마코토 전 고베대 법학부 교수는 포럼에서 고이즈미와의 기연(奇緣)을 소개했다. “총리가 나 같은 사람을 방위대 교장 시키려고 했다니 뜻밖이었다. 또 총리는 내각 홍보용 e메일 잡지에 자신의 집권 5년을 평가하는 내외국인의 글을 한 편씩 받겠다며 나를 필자로 지명했다.”

이오키베 씨는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를 누구보다 매섭게 비판해 온 일본외교사 전공의 학자다. 일본 방위대는 자위대 간부를 길러내는 전군(全軍)사관학교 격이다. 이오키베 씨는 고이즈미의 ‘코드맨’과는 거리가 멀다. 지연(地緣)도, 학연(學緣)도 없다. 방위대 교장 직을 제의받은 이오키베 씨는 고사했지만 고이즈미의 요청이 더 끈질겼다고 한다.

결국 이오키베 씨는 방위대 교장으로 ‘고이즈미 정권 5년을 이렇게 본다’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지난주 공식 배포됐다. 거기서도 이오키베 씨는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를 전과 다름없이 비판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일본이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에서 간신히 쌓아 올린 신뢰가 총리의 참배 고집 때문에 크게 손상됐다.’

이 지식인은 총리가 자신을 중용(重用)하고 우대했지만 학자로서의 식견과 양심에 따라 지론(持論)을 폈다. 야인(野人)일 때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다가 장관 자리 하나 주면 하루아침에 코드 맞추기에 바쁜 국내 일부 교수와는 다른 모습이다.

노 대통령은 작년 고이즈미가 참의원의 우정 민영화 부결에 맞서 중의원을 해산하는 것을 보고 “부럽다”고 했다. 국회를 해산할 수 없는 대통령제가 답답하다는 투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일본 총리였다면(또는 우리나라가 내각책임제 국가라면) 고이즈미처럼 5년 이상 국가지도자로 장수(長壽)할 수 있었을까. 지금 노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이상 남았다는 사실에 숨이 막힌다는 국민이 하도 많아서 해 보는 생각이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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