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하종대]中 ‘종교의 장막’은 언제 걷히나

  • 입력 2006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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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준수하고 조국의 통일과 단결을 옹호하며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샤오캉(小康·중류 생활) 사회’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의 취임사가 아니다. 중국 천주교 랴오닝(遼寧) 교구의 페이쥔민(裴軍民·37) 신부가 7일 선양(瀋陽)의 한 성당에서 보좌주교품을 받고 취임 선서를 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샤오캉 사회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 제4세대 지도부의 가장 주요한 과제다. ‘조화로운 사회’ 건설은 서민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현 지도부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선전 문구다.

이날 서품은 나름대로 의미가 깊다. 중국의 천주교 애국회가 바티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품을 강행한 2명의 주교와 달리 페이 보좌주교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또 중국이 공산화된 뒤 해외에서 공부한 첫 유학파 보좌주교다. 199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신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8월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교황청과 중국 정부가 수교 협상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바티칸이 그의 보좌주교 서품을 승인한 것은 이런 경력이 고려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공산당원의 충성 서약을 연상시키는 그의 취임 선서는 바티칸 성직자는 물론 중국의 종교 자유를 열망하는 세계인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속한 중국 천주교 애국회가 ‘중국 공산당의 선전용 종교단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를 확인시켜 준 현장이기도 했다.

페이 보좌주교는 공산당 권력층과 성당 주변을 물샐틈없이 에워싼 무장 경찰을 의식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날 보좌주교 서품을 축하하기 위해 성당을 찾은 미국과 대만의 성직자들은 씁쓰레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 같다.

또 중국 지하 교회의 ‘진정한 신자’들도 그의 취임 선서를 들으면서 18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시안(西安) 교구의 리두안(李篤安·79) 대주교를 떠올렸을 것이다.

개혁 개방을 외치며 경제에서 ‘죽의 장막’을 걷어 낸 중국 당국이 종교에서도 그렇게 하는 날은 언제일까.

하종대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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