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보이’가 자폭테러범으로… 왜?

  • 입력 2006년 4월 17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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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에드 만수르 알바나 씨의 흥겨웠던 미국 시절 모습.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인 2001년 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LA타임스
라에드 만수르 알바나 씨의 흥겨웠던 미국 시절 모습.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인 2001년 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LA타임스
술과 여자, 자유를 좋아했던 요르단 청년이 있었다. 미국은 이 청년이 마음껏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2년쯤 미국 생활을 맛본 그는 자살 폭탄테러범으로 3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LA타임스는 ‘플레이보이’로 시작해 ‘자폭 테러범으로’ 끝난 라에드 만수르 알바나 씨의 삶을 15일 보도했다.

#자유

그는 요르단의 중산층 집안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이슬람교를 엄격하게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됐지만 의뢰인을 모으는 수완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용돈을 대줘 생활이 쪼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2001년 초 관광 비자로 미국에 갔다.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언이라는 이름으로 온타리오 국제공항에서 운전사 자리를 얻었다. 곧 마리화나를 피우고 ‘니르바나’ 같은 반항적 밴드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 술집을 드나들었다.

고국에서 배운 영어 실력도 여자들을 유혹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키는 168cm 정도였지만 ‘환한 미소’는 여자들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였다. 친구들은 “라이언이 미국에서 체감한 자유를 사랑했다”고 전했다.

#굴레

그해 9·11테러가 터졌다. 그의 첫 반응은 “모든 무슬림들이 저렇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나는 오사마 빈라덴과 알 카에다를 혐오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무슬림이었다.

이슬람교를 비방하는 공항의 동료 직원에게 “죽이겠다”며 심하게 말다툼을 한 뒤 일을 그만두었다. 2002년 말 요르단으로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찾지는 못했다. “미국 시절이 그립다”고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 무렵 기도와 금식을 철저히 하는 독실한 신자가 됐다.

2003년 7월 다시 비자를 얻어 미국에 입국하려 했지만 저지당했다. 테러범 목록에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입국 목적과 비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그는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오가는 트럭 운전사가 됐다고 부모에게 알려왔다.

#해석

그는 2005년 2월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에서 차량폭탄을 터뜨려 13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단일 폭탄테러로는 희생자 수가 가장 많은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받은 중산층을 포섭하려는 요르단의 한 조직과 아들이 친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들은 “신나는 일을 찾으려는 성향이어서 이용당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한 범죄 심리학자는 “살아서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죽어서 달성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어느 해석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폭탄 차량의 운전대에 쇠사슬로 묶여 있던 한쪽 손만이 그의 신원을 밝혀 준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었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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