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in Korea]뮤지컬 요덕스토리 관람 도쿄대 교수 오가와씨

  • 입력 2006년 3월 2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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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 초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매료돼 재일 한국인 북송을 지지하는 모임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던 도쿄대 학생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그가 이제 다른 신념 아래 서울을 찾았다. 4월 2일까지 공연되는 ‘요덕 스토리’, 북한 강제수용소의 비극을 그린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 민간단체인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명예대표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66·사진) 도쿄대 명예교수 겸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 교수가 그다. 22일 공연장인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조선 실학사상을 전공한 만큼 수준급 한국어를 구사했다.

“내가 북한인권운동에 나선 것은 젊은 날에 대한 회오와 반성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빚이 모두 사라질 수야 없겠지만….”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오가와 교수가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은 1970년대 초반. 북한 정권이 주체사상을 앞세워 1인 독재체제를 굳히던 때였다.

“‘과연 저게 내가 동경한 나라였나’ 하는 환멸 때문에 돌아선 뒤로 담을 쌓고 살았죠.”

북한인권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1993년 8월 도쿄의 한 식당에서 열린 ‘북조선 귀국자’ 모임에 참가한 일. 일본에서 ‘북조선 귀국자’란 말은 북송선을 탄 사람 혹은 한국인 남편을 따라간 상당수의 일본 여성을 가리킨다.

이 모임에서 한 식당 여주인이 “북송선을 탄 세 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고생하다 한 명은 죽었다는 소식을 한참 뒤에야 들었다”며 울부짖는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정치범수용소를 거친 탈북자들의 수기를 손에 잡은 것도 그 무렵. 수기의 구절구절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지식인으로서 침묵할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는 북송 일본인은 물론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결심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1999년 시작돼 올해 7회째를 맞는 ‘북한 인권·난민 문제 국제회의’에도 일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적극 활동해 왔다.

그는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독재정권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안타깝다”면서 “그러나 지난해 12월 유엔총회의 북한인권 관련 결의문,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 등 국제적 성과에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가와 교수는 ‘수용소’란 말만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21, 22일 연이틀 ‘요덕 스토리’를 관람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 일본인 할 것 없이 뮤지컬을 보며 북한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국의 일부 진보세력은 북한의 인권현실을 조금도 모르고 있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모르지는 않는데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오가와 교수는 “아니에요. 그들은 정말 몰라요. 정치범수용소 실상을 안다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외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격하게 말했다.

일본 귀국 후 계획을 묻자 오가와 교수는 “정치범수용소 등 북한 인권 실태에 관한 글들을 모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일본인이 북한 현실을 알 수 있도록 책을 낼 생각”이라며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이 좀 더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 약력

△1963년 도쿄대 동양사학과 졸업

△1969∼2001년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2001년∼현재 니쇼가쿠샤대 교수 (동아시아사상사)

△1978∼79년 연세대 국학연구원 유학

△1984년∼현재 ‘조선문화강좌’ 기획 및 강사

△1992∼98년 ‘임진왜란연구회’ 주도 및 충무공 전적지 답사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결성

△저서: ‘조선실학과 일본’,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시대를 밝힌다’(한글판) 등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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