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들이 남긴 시-그림 日 지방문화재 지정 움직임

  • 입력 2005년 8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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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쿠인 선사가 조선통신사 일행 중 마상곡예사를 묘사한 그림.
일본 하쿠인 선사가 조선통신사 일행 중 마상곡예사를 묘사한 그림.
《임진왜란 이후 평화친선 외교사절로 방일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들이 남긴 시 글 그림 등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일본 시즈오카(靜岡) 현에서 일고 있다. 일본 후지(富士)산 자락의 시즈오카 현 시미즈(淸水) 시의 고찰 세이켄(淸見)사. 이곳에는 지금도 조선통신사의 묵향이 400년 세월을 건너 은은히 풍긴다. 초입 현판에도, 종루에도, 법당에도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명필로 가득하다.》

이 절의 주지격인 이치조 후미아키(一조文昭) 노사(老師)는 조선통신사 관련 시문첩(詩文牒)을 사찰 ‘보물고’에서 꺼내와 보여 주었다.

“이건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전한 사람으로 유명한 조엄(趙2)이 남긴 글입니다.”

동행한 김양기(金兩基) 도코하가쿠엔(常葉學園)대 객원교수가 잘 보존된 시문첩을 넘기며 감탄했다. 조엄(1719∼1777)은 1764년 파견된 제11차 통신사 472명의 대표인 정사(正使). 그는 사절단을 이끌고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로 가던 길에 세이켄사에 들렀다.

조선통신사 정사 조엄이 세이켄사의 수려한 풍광을 찬미한 글.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조선통신사 유묵 등 70여 점이 보존돼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9년 뒤인 1607년 세이켄사에 머문 1차 조선통신사 대표단이 이곳 절경을 두고두고 이야기했고 이 영향으로 이후 200여 년간 12차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찾을 때마다 이 절은 단골 코스가 됐다.

당시 이 절의 말사 격이었으나 현재는 별도의 ‘하쿠인(白隱)파’ 본산이 된 인근 사찰 쇼인(松蔭)사에도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 선종을 중흥한 학승이자 달마도의 화가로 유명한 하쿠인(1685∼1768) 선사가 남긴 그림 ‘마상재(馬上才)’는 바로 조선통신사가 대동한 마상곡예사를 보고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인근 하라(原)에서 수백 년간 대를 이어온 다카시마(高嶋)양조회사가 한정품으로 팔고 있는 일본 전통 술의 상표로 사용되고 있다.

이 회사 다카시마 야스히데(高嶋康豪) 사장은 “한중일 삼국은 40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은 아버지, 한국은 형, 일본은 동생 같은 한 가족”이라면서 “조선통신사는 당시 양국 외교를 넘어서 ‘진정한 동아시아 혼(魂)의 교류’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치조 노사 또한 조선통신사가 남긴 ‘보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사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졌던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일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시즈오카 현과 시를 상대로 문화재 지정 교섭에 들어간 김 교수의 말이다.

시즈오카=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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