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역사 결산]50여회 평행선 토론…‘공동교과서’ 불발

  • 입력 2005년 6월 1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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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3월 25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결산 모임을 가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3월 25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결산 모임을 가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3년이 넘게 계속된 한일 역사학자들의 공동연구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역사인식의 간극은 별로 좁혀지지 않았다. 양국의 역사학자 11명씩으로 구성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제1기 연구위원들은 50여 차례나 머리를 맞댔으나 시각차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결국 양국의 역사인식을 좁히는 일은 곧 발족할 제2기 공동연구위원회로 넘어가게 됐다. 제1기 역사공동연구는 2002년 3월 시작됐다. 2001년 4월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이 있은 뒤 그해 10월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역사공동연구에 합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등 3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한국의 서울 부여 강릉 진주, 일본의 도쿄(東京) 후쿠오카(福岡) 나라(奈良) 등을 오가며 토의를 거듭했다. 한국 측에선 연구위원 외에도 별도의 연구 협력자 91명이 참여, 한일 관계사 중 103개의 세부 주제를 자체 선정해 연구를 진행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역사공동연구에 임하는 한일 두 나라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한국은 이를 통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막고 양국 공동교과서 집필까지 나아가려 했으나 일본 측은 역사 왜곡 파문을 물 타기 하려는 의도가 짙었다.

이는 역사연구 과정은 물론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측은 위원회의 실효성을 위해 정부 인사의 참여를 주장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 왜곡 등의 주요 현안이 연구 주제에 포함되지 않고 공동연구 결과가 역사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본 측은 단일한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정한 정부 기준을 통과한 다양한 민간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자국의 교과서 제도를 내세워 공동연구 결과의 교과서 반영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위원회의 한국 측 총간사인 조광 고려대 교수는 31일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비슷한 역사문제를 겪은 독일과 프랑스도 1970년대 이후 30년 동안 공동연구를 통해 공동교과서를 사용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며 이해를 구했다.

위원회가 내놓은 A4 용지 2000쪽 이상의 최종 보고서는 양국 역사학자들의 인식을 화학적으로 융합한 성과물이 아니라 각각의 주장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데 머물렀다.

정부와 위원회는 최종 보고서를 6월 중 책자로 만들어 전국 도서관 등에 배포하고 역사교과서 편수 때 참고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달 20일 열리는 한일정상회담에서 제2기 역사공동연구의 출범을 공식 발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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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역사연구委 보고서…‘독도-위안부-교과서왜곡’ 빠져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 인식에 관한 괴리를 좁히기 위해 공동연구를 진행해 온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3년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31일 공동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의 한국 측 총간사인 조광(趙珖) 고려대 교수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2002년 3월 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19개 주제를 중심으로 50여 차례 합동 회의를 개최한 끝에 최종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2001년 4월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가 불거진 뒤 그해 10월 한일정상회담에서 공동연구가 합의돼 만들어지게 됐다. 그러나 독도 영유권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는 일본 측의 기피로 처음부터 의제에서 제외됐다.

고대 한일관계, 임진왜란, 식민지정책 등 19개 주제에서도 양측은 인식차를 좁히지 못했다.

일제강점에 대해 한국 측은 폭압적인 동화정책이었다고 규정한 반면 일본 측은 한국에 근대적 관료제가 이식되고 국제화가 진전된 시기로 파악했다.

을사늑약과 한일강제합방에 대해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라고 주장했으나 한국은 강제적이고 불법적이므로 무효라고 맞섰다.

이 때문에 최종 보고서는 주제별로 양국 연구자가 각각 작성한 논문 55편(한국 측 26편, 일본 측 29편)을 나란히 싣는 데 그쳤다. 양국 역사교과서에도 연구결과를 반영하지 못했다.

보고서는 외교통상부와 교육인적자원부 등 관련 기관 홈페이지에 1일 공개된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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