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0년 페탱 ‘비시정부’ 수반 취임

  • 입력 2004년 7월 1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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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필리프 페탱.

프랑스의 현대사는 그에게서, 그 현기증 나는 영욕(榮辱)의 교차 속에서 훼절(毁節)을 보았다.

1차 세계대전 때 ‘승전(勝戰)의 영웅’은 2차 세계대전에서 민족의 반역자를 자임했으니.

그는 ‘베르ㅱ 전투의 전설’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새를 지켜냈던 그는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육군 원수로 승승장구한다.

부하들은 그를 따랐다. “그가 지휘하면 죽을 확률이 적다.”

1940년 6월 히틀러의 군대가 속전속결로 프랑스 국경을 돌파해오자 페탱은 휴전파의 선봉에 섰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는 휴전을 선언하고 만다.

그리고 그해 7월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정권이 들어서자 기꺼이 그 수반이 되었다.

비시정부는 ‘히틀러의 도구’였다. 영토의 3분의 2를 독일 점령군에 헌납하고 ‘프랑스의 껍데기’를 유지했으니.

그러나 드골은 결사항전을 외쳤다.

1차대전 때 페탱의 부관을 지냈던 드골은 전의(戰意)를 상실한 상관에게 총을 겨누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승리의 순간에 참여해 있어야 한다!”

‘레지스탕스의 상징’ 드골. 그가 있었기에 프랑스는 2차대전의 굴욕에도 자존심과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종전 후 그 가차 없는 과거 청산과 ‘대숙청’은 그래서 가능했다. “민족의 배반자를 단죄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그 ‘역사의 법정’에서 페탱은 맨 앞자리에 섰다.

그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내가 있었기에 프랑스의 남쪽은 독일군의 군홧발을 피할 수 있었다.”

실제 비시정부에서 그의 처신은 이중적이다.

1942년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에 항의하는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그였다. 그러나 알제리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연합군과 합류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것도 그였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에서 ‘개인의 진실’은 공허하다.

분명한 것은 페탱 정부 하에서 15만명의 프랑스인이 총살을 당하고 100만명이 군수공장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페탱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얼마 뒤 종신형으로 감형됐으나 1951년 독방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파리가 함락됐을 때 그의 나이 벌써 84세였으니, 그는 너무 오래 살았던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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