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일본]<1>일본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

  • 입력 2003년 11월 24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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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릴 정도로 장기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에 회생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인 일본의 제조업 기술 경쟁력에 미국식 경영의 강점을 더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사진은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의 요사코이 마쓰리(축제) 모습.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릴 정도로 장기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에 회생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인 일본의 제조업 기술 경쟁력에 미국식 경영의 강점을 더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사진은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의 요사코이 마쓰리(축제) 모습.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글 싣는 순서 ▼

① 일본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

② 디지털 패권, 미국에서 일본으로

③ 중국은 무섭지 않다

④ 기술의 블랙박스화

⑤ 지방 활력의 원천, 클러스터

⑥ 일본식 변화의 한계

⑦ 전문가에게 듣는다

“연공서열은 악(惡)이다.”(시노미카 다카노리·四之宮孝典 마쓰시타전기 경영전략그룹 이사)

사실 이는 취재팀이 방문한 일본기업에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다.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일본기업으로서는 충격적인 변화.

캐논은 금년부터 입사연도에 따라 호봉이 승진되는 제도를 아예 폐지했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것. 연봉격차도 갈수록 커져 40세의 경우 두 배까지 차이가 난다.

전 세계 휴대전화 배터리의 60%를 공급하고 있는 산요는 금년부터 회사의 사업 부서를 280개 팀으로 쪼갰다. 팀장이 전권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고 3년 연속 수익을 내지 못하면 좌천된다.

오이와 아키오(大岩明彦) 산요 홍보과장은 “스피드 경영과 책임을 지는 풍토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실무자끼리 끊임없는 협의를 통해 다른 의견이 없어야만 결정을 내리던 이른바 ‘협의문화’를 폐기한 것. 디지털 시대에 협의문화는 오히려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판단이다.

야마토운수 시라토리 미키(白鳥美紀) 홍보부장은 일본기업의 변화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84년 야마토운수 역사상 자신이 첫 여성부장(한국의 상무에 해당)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회사의 종업원은 11만명.

▽일본식 구조조정=한국에서 구조조정은 대개 인력감축을 뜻한다. 미국에서 ‘Rest-ructuring’은 사업 재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에서는 기업의 체질, 혹은 기업의 DNA가 변화해야 구조조정이다.

1980년대 일본 제조업이 세계를 제패할 당시 외국인들이 일본식 경영의 장점으로 칭송하고 벤치마킹하던 덕목은 수도 없이 많다. 종신고용, 연공서열, 성장과 시장점유율 중시, 전사적 품질관리, JIT(Just-in-Time) 시스템. 게이레쓰(系列), 여론수렴형 리더십, 가이젠(改善)….

그러나 1991년 거품붕괴 이후 13년간 불황의 터널을 지나온 일본 기업들은 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이것이 일본식 구조조정이다.

우선 미국식 혁신기법이 대거 도입됐다. 끊임없이 기업의 규모를 키우는 데 집착하던 일본 기업들이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 부서를 핵심역량위주로 재편하고 수익성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

13년 연속 이익을 경신한 생활용품 업체 가오는 대중의약품 사업을 접는 대신 원래 강점을 지닌 생활용품에 집중, 다이어트용 식용유 등 잇달아 히트상품을 내놓고 있다. 다케다 약품은 농약, 화학, 식품 등 비의약품사업에서 손을 떼고 미국시장에 본격 진출, 주력제품인 의약품의 매출을 크게 늘렸다.

캐논 역시 PC, 액정디스플레이 등 7개 사업을 접고 복사기, 프린터 등 주력사업에 집중해 미국의 제록스를 눌렀다.

히토쓰바시대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경영학) 교수는 “자만심에 도취됐던 일본기업들이 10년 불황을 겪으면서 일본식 경영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뒤 철저하게 수익과 효율성 지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방해되는 일본식 관행은 해체되면서 일본기업의 DNA가 바뀌고 있다는것.

▽닛산의 충격=국제 경쟁력을 갉아먹던 협력업체와의 수직적 계열관계와 묵시적인 카르텔도 파괴되고 있다. 협력업체 제품이라고 해서 비싸더라도 구매하고 모기업 눈치 때문에 신제품을 개발해도 다른 기업에 팔지 못했던 관행이 바뀌고 있다.

도요타자동차가 최대주주인 자동차 부품업체 덴소는 공공연하게 “덴소는 전 세계의 어떤 자동차 회사에도 부품을 공급한다”고 말한다. 도요타 역시 “가격과 품질이 좋으면 어떤 부품업체와도 거래를 한다”고 선언했다.

완성차와 부품업체간 전통적 ‘갑-을 관계’에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1999년 취임, 닛산차를 혁신시킨 카를로스 곤의 영향이 크다.

곤씨는 사장에 취임한 뒤 본사가 요구하는 가격에 납품을 하지 못하는 협력업체는 거래를 끊었고 계열사 주식도 팔아치웠다.

“사실 곤이 한 개혁은 일본인이면 누구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본 특유의 문화 때문에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들어와 이를 행동으로 옮겼고 효과가 나타나면서 일본기업들이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하라 쇼이치로·原正一郞 노무라종합연구소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

▽미국식과는 달라=그렇다고 일본의 경영관행이 모두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문화배경에 맞고 기존 강점은 유지할 수 있는 제도는 유지하면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구식 경영기법을 접목하고 있는 것. 가장 변하지 않는 부분이 종신고용 관행과 기업지배구조다.

세계적으로 뉴스가 됐던 닛산, 마쓰시타 등 일본 대기업의 인력구조조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자회사로 옮겨갔거나 신규인력을 뽑지 않아 결원이 생긴 것이다.

일본의 자존심 도요타자동차도 “종신고용은 폐지됐고 다만 장기고용을 할 뿐”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기자가 공장을 방문해 보니 용어만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종신고용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캐논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 사장은 이에 대해 “일본기업의 강점은 생산현장에서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공정을 개선하고 현장 엔지니어들에게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데 있다”며 “이런 강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업원의 회사에 대한 충성과 장기고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외 이사제도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경영진은 자신들이 주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일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은 종업원의 대표며 종업원을 위해 일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시각에 따라서는 ‘한물간 동도서기(東道西器·동양정신을 유지한 채 서양기술을 받아들인다) 수준의 절충론’이라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 수석연구원의 해석은 다르다.

“일본의 변화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또 최근 급변을 겪은 한국의 시각에서는 일본의 변화가 느리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제조업의 생산기술은 여전히 세계최고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닛산이 곤의 영입 후 단기간에 살아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기업의 각성은 세계 경제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꿀 수 있고 특히 주력산업에서 경합 중인 한국기업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일본의 경영문화 변화
거품붕괴 전최근
자본주의 방식종업원 자본주의주주자본주의 확산
해고종신고용장기고용
승진 및 보상연공서열연공서열 파괴
경영진 견제내부 평가사외감사 도입
의사결정느림스피드 강조
혁신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우선순위장기적 성장수익성 중시로 변화
부품조달폐쇄적 계열화아웃소싱 도입
회사관회사 충성가정과 회사의 조화
채용내부 육성일부 경력직 채용

▼일본의 저력 '셀 방식' 생산 ▼

일본 도쿄 우에노역에서 전철로 1시간10분, 다시 승용차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이바라키현 아미 지역의 캐논 복사기 공장. 공장에 들어선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공장하면 으레 있으려니 했던 컨베이어벨트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1913년 미국의 포드 자동차에서 처음 시작한 컨베이어 생산방식은 근로자들이 특정 부분을 나눠 맡아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게 특징.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대량생산의 혁명을 이뤄냈고 이후 수십년간 전 세계의 제조업체들은 앞을 다퉈 이를 흉내 냈다.

캐논 공장에서 컨베이어가 안 보이는 것은 이 공장이 ‘셀(cell)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 방식과는 달리 4∼6명의 종업원이 팀을 이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품을 조립하는 것이 특징.

이시이 히로시(石井裕士) 공장장은 “컨베이어 시스템은 공장 전체가 가장 속도가 느린 종업원에 맞춰 일을 해야 하지만 셀 방식은 각자의 능률에 따라 일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일이 더딘 동료까지 도와줄 수 있어서 생산 효율이 3배나 높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러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에서 셀 방식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생산제품이 바뀌면 기존에는 라인을 통째로 바꿔야 했지만 셀 방식은 조립부품만 바꾸면 된다. 대규모의 시설투자도 필요 없고 재고도 크게 줄어든다.

셀 방식을 도입하면서 아미 공장에선 2649m에 이르던 컨베이어 벨트와 7개의 재고창고가 사라졌다. 캐논 전체로는 총 2만207m의 컨베이어벨트와 45개 재고창고를 없앴다.

아미 공장에는 혼자서 240개의 부품을 조립해 12시간 만에 1억원 이상의 고가 컬러복사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공이 22명 있다. 회사는 이들을 ‘슈퍼 마이스터’라고 부르며 특별대우를 해준다. 다른 기능공들이 슈퍼 마이스터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육도 시킨다.

이시이 공장장은 “셀 방식은 생산의 노하우가 생산기계가 아닌 종업원에게 체화돼 있기 때문에 외국기업이 모방하기 어렵다”며 “일본기업이 장기고용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국의 경영학자인 마이클 포터 교수는 일본 제조업의 강점을 ‘생산능률의 극대화’에 있다고 진단한다. 일본의 생산성은 10년 불황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강해졌다는 사실을 캐논 공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취재팀 ▼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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