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구국의 영웅…1958년 佛드골내각 출범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35분


코멘트
“프랑스에 입국하려면 ‘샤를 드골 공항’을 거쳐야 하듯, 드골을 통하지 않고는 프랑스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

삶 자체가 정치적 모델이었던 드골. 그의 신념과 철학은 바로 ‘국가적 직관(直觀)’이었다. 드골 자신이 회고록에 썼듯 그의 인생은 조국 프랑스에 위대한 이상을 심어주는 데 소진(消盡)됐다.

1953년 정계를 은퇴했던 드골은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이 요동치자 복귀를 선언한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는 위기가 와야 한다. 그것 말고는 265가지 치즈 맛을 뽐내는 이 나라를 단결시킬 수 없다.”

그리고 1958년 11월. 드골 내각이 출범한다. 프랑스가 마침내 골리슴(gaullisme)을 정치적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라고 할 수 없다”는 호언처럼 드골은 국제 외교무대에 그 당당한 풍채로 우뚝 섰다. 드골의 정치는 흡사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것은 ‘불길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쇠부지깽이와 통탄할 만한 독재자 사이’의 그 무엇이었다. ‘오만과 교활함’이라는 비난과 ‘경륜과 직관’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케네디와 처칠은 드골을 싫어했다.

처칠은 드골에 대해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심지어 파시스트적인 성향마저 지녔다.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착각하는 ‘구세주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반감을 드러냈다. 드골 역시 그들을 빈정댔다. 그는 케네디의 대외정책이 거슬릴 때면 “미국에서 부러운 것은 재클린밖에 없다”고 쏘았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1968년 5월 학생들의 대규모 소요. 이제 권력이 추월(追越)당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는 신임투표의 승부수를 던졌으나 패배했고 깨끗이 물러났다.

드골의 정치적 후계자인 시라크 대통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국민투표 직전 그는 내 의견을 물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