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리포트]커가는 테러 공포… 날개 돋친 비상용품

  • 입력 2003년 2월 20일 21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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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트테이프 남은 거 있어요? 언제 살 수 있나요?” 요즘 뉴욕 일대의 최고 인기상품은 덕트테이프(Duct tape)다. 덕트테이프는 배수관 등을 수선할 때 사용하는 은색의 테이프로 집안 공사용으로 두루 쓰인다. 가정용품 전문점인 홈디포의 경우 뉴욕과 워싱턴 일대에서 덕트테이프의 판매증가율이 무려 1000%를 기록했다. 플로리다주 같은 곳에서는 200∼600% 늘었다. 하나에 4∼5달러인 덕트테이프가 테러리즘 시대의 필수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가 테러 위험이 높다면서 테러경보를 ‘오렌지’로 격상시키면서 국민들에게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는 테러에 대비해 덕트테이프와 비닐시트로 집안을 방어하라”고 권고했다. 테이프는 미 적십자사도 재난대비용으로 가정에 꼭 갖춰놓도록 추천하는 품목이다.

뉴욕과 워싱턴 등 동부 대도시 주변의 가정용품 전문점과 철물점들은 테이프를 잔뜩 쌓아두었지만 테러 위협에 놀란 시민들은 이것들을 다 들고 가버렸다. 맨해튼에 사는 조디 바이가르(37·여)도 테이프를 사다가 침실 창틀 사이를 막아놓았다. 겁먹은 표정의 그녀는 “TV에서 3월3일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그날은 회사에 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뉴욕의 한 철물점 주인은 “테이프와 비닐시트를 사가는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해 고개를 숙이고 계산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고객이 무척 많다”고 말했다. 이런 물품의 사재기 경향은 도시나 동네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대도시와 그 주변이 민감하다. 그런가 하면 뉴저지주의 한 가정용품점에서는 입구에만 들어서면 비상용품 세트가 진열돼 있는데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반응이 사람마다 다른 셈이다.

일부 미국 언론은 “화재시 젖은 수건으로 문틈을 막아놓으면 연기를 막을 수 있지만 생화학무기는 막지 못하며 테이프와 비닐시트로는 이것들의 3분의 2까지 막을 수 있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동부지역에선 비상용품 세트가 평소보다 40%는 더 팔렸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테이프 구입행렬을 보면서 코웃음을 친다. 맨해튼 서드 애비뉴의 730빌딩에서 일요일에만 일하는 조지 위너(56)는 16일 “TV에서 보니 코네티컷주에 사는 어떤 사람이 테이프로 방문과 창문을 모두 봉해놓았던데 참 우스꽝스럽더라”고 말했다. 30대의 백인 변호사는 “부시 정부가 ‘테러에 대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면서 시민들에게 덕트테이프를 바르라고 하는 것은 위협감을 조성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맨해튼의 잡지판매점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바샤 칸(31)은 “테러설이 자주 들리지만 그게 다 정부의 프로퍼갠더(선전)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하면서 “나는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은 ‘오렌지’ 경보가 잘못된 정보에서 발령됐을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계속되는 테러 위협이 바꿔놓은 뉴요커의 삶은 이것만이 아니다. 퀸스에 사는 주부 칼라 와이스(38)는 며칠 전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다. 집에서 대피해야 하거나 남편이 집에 오지 못할 경우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차는 어디에 두는 게 안전한지 등을 이야기했다. 2001년 ‘9·11사태’ 직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와이스씨는 “친구가 ‘물을 사두면 안심이 된다’고 말해 커다란 용기에 든 물을 사왔더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사는 한 회사원은 맨해튼으로 출근하면서 20∼30분을 역에서 기다리더라도 사람이 가득찬 전철은 타지 않는다. 사람이 많을수록 테러리스트의 공격 대상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 뉴욕의 한 회사가 ‘도심 서바이벌 키트’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은 595달러짜리 세트에는 방독면 방독복 고음알람(붕괴된 건물에 묻힐 경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 30일간 사용가능한 프래시 등이 들어 있다. 테러리즘 시대의 도시민을 위한 상품인 셈이다.

TV채널 NY1은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네킹을 비치한 철물점 밖에까지 줄을 서있는 사람들 모습과 항(抗)방사능 알약을 사는 시민들 모습을 비치기도 했다.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출근하는 한 금융회사 직원은 며칠 전 기차에서 양복차림의 한 남자가 방독면과 방독복을 파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씁쓸했다고 말했다. 세일즈맨은 “러시아에서 이동식 핵무기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라고 외치기도 했다는 것.

테러공포가 확산된 가운데 17일 사카고의 한 나이트클럽에서는 종업원이 뿌린 최루가스를 화학가스로 오인한 손님들이 한꺼번에 입구로 몰려 2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워싱턴의 ‘안전방(safety room)’업체는 가정집에 타지 않는 플라스틱 방을 꾸며주는데 3200∼5000달러를 받고 있다. 이 회사 공동대표 레스터 루이스는 “요즘 문의전화도 무척 많고 장사도 잘 된다”고 말했다.

첫 오렌지 경보가 나왔던 2002년 ‘9·11’ 1주년을 무사히 넘겼던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도 이번에 두 번째로 나온 오렌지 경보에 신경을 쓰고 있다. 경비원들은 회사 방문객은 물론 주변을 지나는 트럭들까지 유심히 살피고 있다. 트럭 테러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 일부 회사는 직원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주말에 건물 유리창 보강공사를 하기도 했다. 유리창 파편이 튀지 않게 하는 공사였다.

요즘 뉴요커들은 이런 방송을 들으며 출근한다. “뉴욕 경찰은 화학무기 감별법을 교육받았다. 사린은 무색의 수증기이며 주시푸르트 껌 냄새가 난다. 사이나이드는 아몬드를 태우는 냄새가 난다.” 퇴근 길에는 이런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레이먼드 켈리 뉴욕경찰국장은 경찰의 순찰 코스와 시각을 매일 바꾸도록 지시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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