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기현/러시아의 ´북한 카드´ 외교

  • 입력 2002년 5월 22일 18시 47분


북한 백남순(白南淳) 외무상이 북-러 외무장관 회담을 마치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하루 앞둔 22일 모스크바를 떠났다. 북한 외교 책임자로서 15년 만의 러시아 방문이 부시 대통령의 방러 직전에 이뤄진 것은 우연일까?

백 외무상의 이번 방러는 2000년 2월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북한 방문에 대한 답방이다. 백 외무상의 건강 등 이런저런 사정으로 2년 넘게 미뤄지던 답방이 시급한 현안이 생긴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영국 BBC 방송의 니콜라이 고르슈코프 모스크바 특파원은 “백 외무상의 방러 일정은 우연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가장 효과적인 시점을 골라 백 외무상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이바노프 장관 등 러시아 고위관리들은 백 외무상에게 “북한을 ‘악의 축’국가로 규정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북-러 우호관계를 강조했다. ‘불량 국가’에 대한 미국의 추가 제재에 반대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백 외무상의 방러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상기시키면서 미-러 정상회담 의제에 한반도 문제를 자연스럽게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은 2000년 7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주요8개국(G8) 정상회의 당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해 5월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제외교무대에 데뷔하기 위해 오키나와로 가는 길에 러시아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G8 국가 원수 중 유일하게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만나본 푸틴 대통령은 오키나와 회담 내내 북한의 미사일 개발 포기 가능성을 흘리면서 세계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러시아는 경제적 형편 때문에 북한에 대해 예전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카드’를 잘 이용해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김기현 모스크바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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