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호섭/노무현과 후진타오

  • 입력 2002년 5월 2일 18시 30분


한국의 국가 진로에서 미국은 좋은 의미이거나 나쁜 의미이거나 매우 중요한 국가다. 최근 확정된 여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볼일이 없으면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에 대한 정치인 노무현의 시각이나 관점은 다른 누가 쉽게 용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볼일이 없으면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의 모습과 노 후보의 미국에 대한 언행을 비교해보면서 우리 국민은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될까.

▼˝미국 방문하지 않겠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부주석은 현재 미국을 방문해 정계 경제계 학계의 주요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있다. 한가할 리 없는 지도자이지만 볼일을 만들어서 미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결코 사대적이거나 대미의존적으로 비치고 있지도 않다.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은 그의 방미를 ‘중국 새 지도자의 국제무대 데뷔’로 크게 보도하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 가운데 대미관계에서 중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세계의 국가 지도자들이 미국에 대해 갖는 자세는 대체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반미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북한의 지도자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들은 미국이 얼마나 사악한 국가인지를 잘 모르거나 미국에 속은 경우라고 주장한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을 파악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에 반미노선에 동참하자고 요구한다. 이런 지도자들은 자국민들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내몰아서 극심한 고통을 준다.

둘째, 친미다. 냉전 종결 이후 국제사회의 유일한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도를 넘어서 사대주의가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미국과 무조건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 심한 경우 미국의 일부 세력과 결탁해 자국의 국내정치를 장악하려고 하며, 국내의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미국이 대신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을 기대한다. 옛 베트남의 티우 정권처럼 우파 독재자들은 많은 경우 사대주의적 친미주의자이다.

셋째, 미국에 대한 무관심이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만 잘 하면 되고 꿀릴 게 없으면 미국을 상대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과 관계를 맺으려고 찾아다니는 것은 뭔가 득 볼 것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국제정치 현실에서 국력 차를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는 미국과 사실상 1대 1로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치 경제 안보 문화를 포함한 거의 모든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지만, 애써 ‘미국은 없다’거나 ‘미국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지향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국제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국익을 신장하려는 한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서구 국가에 대한 무지와 자신감 부족을 쇄국정책으로 은폐한 조선조 말기의 국가 진로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익 위한 외교노선은…▼

넷째, 용미(用美)다. 단수가 높고 지혜로운 국가 지도자들이 채택하는 노선으로 미국이 갖고 있는 여러 자원을 자국의 국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미국이 현실적으로 중요한 국가이니 관계를 맺어야 하며 이왕 맺을 거라면 좋게 맺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면 서유럽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채택하는 노선이다. 이런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민이 편안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면 자존심을 숙이고 미국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들이라고 바쁘지 않을 리 없지만 볼일을 만들어서 미국을 방문해 국익에 플러스가 된다면 격에 맞지 않은 정치가라도 만나는 것을 즐긴다. 매년 몇백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안겨주는 고객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과의 관계형성에 엄청난 노력을 쏟는 것이다.

지혜로운 차세대 국가 지도자에게는 미국 방문 자체가 큰 볼일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땅치 않고 피곤하지만 미국을 방문해 국민이 편하고 윤택해지는 외교노선과, 지도자는 자존심을 높이지만 국민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외교노선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책임 있는 지도자의 선택은 자명할 것이다.

김호섭 중앙대 교수·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