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응징戰 3개국 지도자의 득실]

  • 입력 2001년 11월 1일 18시 39분


‘초조한 부시’ ‘곤혹스러운 블레어’ ‘실속 챙기는 푸틴’.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겨냥한 미국의 군사공격이 4주째 접어들면서 대(對) 테러 국제연대의 주역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테러전쟁 대차대조표에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美 부시, 체면 구기고▼

부시대통령은 9월11일 테러 이후 국민을 독려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탄저병 확산과 추가테러에 대한 우려 등 잇단 악재가 겹쳐 고전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전국제조업협회 연설에서 “우리는 인내하고 전력을 기울여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후손들을 위해 그 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고 전의를 거듭 밝혔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한 달째 폭격하고 있지만 탈레반의 저항은 완강하고 빈 라덴의 소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국제적십자사와 민간인 건물에 대한 오폭으로 국제사회의 여론도 예전 같지 않다. 이슬람권의 반미감정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국내 전선도 계속 꼬인다. 의회 대법원 백악관 등 입법 사법 행정 3부가 모두 탄저균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수사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가운데 탄저병 감염자는 늘어나고 있다. 최근 브리핑 때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백악관의 착잡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미 언론의 해석이다.

▼英 블레어, 안팎 몰리고 ▼

9·11 테러 이후 정력적인 외교를 펼치며 반(反)테러 연대 구축의 선봉에 서 온 블레어 총리. “2차대전 때의 윈스턴 처칠 같다”는 찬사까지 들었던 그가 아프간 전황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안팎으로 몰리고 있다.

그가 대 테러전 지지 기반 확대를 위해 내디딘 중동행은 첫날부터 삐끗거렸다.

블레어 총리는 31일 영국 총리로는 사상 처음 시리아를 방문,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과 만났으나 회담은 결렬됐다. 아사드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매일 TV를 통해 수백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 가는 장면을 보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며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공개 비판했다.

블레어 총리의 다음 방문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응도 싸늘하기는 마찬가지. 그의 방문에 앞서 나예프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내무장관은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재를 뿌렸다.

블레어 총리는 영국 내에서도 야당인 보수당은 물론 노동당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민간인 사상자를 내면서 도덕적 기반을 잃었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러 푸틴대통령, 실속 챙기고▼

테러와의 전쟁을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열강들의 외교전 가운데서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실속 외교’가 단연 돋보이고 있다.

옛 소련의 KGB 요원 출신인 푸틴 대통령은 어려움에 처한 미국 등에 일단 대가 없는 지지를 보낸 뒤 후일을 도모하는 식으로 수완 높은 외교력을 발휘하고 있다.

푸틴 자신도 지난달 3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미국 테러 참사 이후 러시아가 보인 자세는 서방의 신뢰할 수 있는 제휴자라는 사실을 입증했다”며 그간의 외교적 성과를 과시했다.

그의 외교 전략을 한마디로 말하면 ‘작은 것은 양보하고 나중에 더 큰 것 챙기기’. 테러 참사 후 줄지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푸틴은 한결같이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대가를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 상대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지난달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도 푸틴은 곤경에 처한 미국의 처지를 무조건 지지함으로써 이달 중순 예정된 미-러 정상회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을 들었다. 불과 한 해 전만 해도 안보 문제 등을 놓고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아쉬운 소리를 해오던 러시아였다.

<박윤철·워싱턴·파리=한기흥·박제균특파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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