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작전 특수부대 투입 사례>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7시 07분


미군이 특수부대 중심의 지상군 침투작전으로 정권교체를 성공시킨 대표적 사례는 1983년 그레나다 침공과 1989년 파나마 침공을 꼽을 수 있다. 반면 1993년 소말리아에서는 군벌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색출작전을 펼쳤다가 실패하고 치욕적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레나다 침공▼

1983년 10월 25일, 여명을 틈타 미군 1900여명이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그레나다는 당시 유혈쿠데타로 공산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 제2의 쿠바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선봉에 선 것은 제75 특공연대 레인저부대 병력 1000여명. 먼저 AC130 건쉽이 1분에 6000발을 쏟아붓는 융단폭격으로 대공포를 궤멸시키자 레인저부대원들이 포인트살리나스 국제공항에 낙하해 전광석화 같은 공격을 펼쳤다.

긴급 분노 (Urgent Fury)로 이름 붙여진 이 침공작전은 미군이 30일 쿠데타를 주도했던 군사평의회의장인 허드슨 오스틴과 버나다 코드 부수상을 생포했음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엿새만에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파나마 침공▼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를 축출하기 위해 펼쳐졌던 1989년 12월의 정당한 명분 (Just Cause)작전에는 2만여명의 미군이 투입됐다.

20일 오전 1시 제75특공연대 레인저부대의 1개 중대 병력이 낙하산을 타고 오마르 토리조스 국제공항과 토큐먼 군사활주로를 장악했다. 같은 시간 레인저의 다른 병력은 리오하토 공항과 노리에가의 해변 관저를 급습했다.

작전 5일째인 24일 노리에가가 파나마시티 교황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면서 작전은 닷새만에 상황이 끝났다.

▼소말리아 개입▼

미군은 92년 12월 유엔 안보리의 결의로 내전에 찌든 소말리아에 다국적군의 일환으로 3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희망 회복 (Restore Hope)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1800여명 규모의 해병대 선발대가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미군은 이듬해인 93년 5월 작전권을 유엔에 넘겼다. 그러나 유엔의 활동이 최대의 군벌 지도자인 아이디드의 저항에 부딪히자 미군은 특수부대원 750여명을 동원해 직접 그를 체포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아이디드는 무사했다. 오히려 소말리아인들이 숨진 미국 병사를 밧줄에 묶어 끌고 거리를 다니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해지면서 미국 내 여론은 악화됐고 결국 미군은 27개월만인 95년 3월 완전 철수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