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아보니]에릭 함슨/ 영어학습 왕도는 없다

  • 입력 2000년 9월 6일 18시 29분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꽤나 지겹도록 받는 질문이 있다. 영어에 왕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일본이나 중국사람들보다 유독 한국사람들이 이 질문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혹시 요행을 바라거나, 새치기를 해서라도 남보다 앞질러 가려는 문화의 단편은 아닐까? 그래서 영어를 파는 사람도 한국에 유독 많은 것 같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나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해보지 않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수많은 미국영국 친구들도 한글 배우는 데 왕도가 있느냐고 묻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는 데 왕도는 없고 그저 많이 연습하고, 될 수 있으면 한국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 지름길이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영어는 언어이므로 한글과 대등한 선상에 놓고 보자. 말을 배우기 위해 한국 어린이들은 어머니와 하루 종일 연습을 한다. 수천번 수만번의 되풀이된 연습 끝에 아이는 그 말을 배우는데, 그 때 뒤돌아서서 아이에게 한글의 문법이 이렇고, 이렇게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인은 영문법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에게 한글 문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잘 모른다. 영문법을 영미인에게 물어보면 똑같은 반응이다. 문법 때문에 영어로 말하기 듣기 쓰기가 제 갈 길을 못 찾는 느낌이다.

또 한가지, 영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감을 없애려면 영어가 학교 교과목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남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고 남의 뜻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영어를 학과목으로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그래! 요렇게 고생시키던 요놈을 졸업하는 그날로 잊어버려야지’라고 다짐하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정말 잊어버리게 된다. 영어는 이제 더 이상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해야 한다. 한국을 여러 나라에 알리기 위해서 여러 나라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싸워서 이겨야 하거나 정복해야 할 도전 목표로 보는데,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그 나라 사람과 문명을 이해하거나, 그 말을 배움으로써 나의 삶이 풍성해지고 지식이 다양해지며 결국은 그 말을 이용해 세계 시장에 내가 만든 물건이나, 내가 연구한 프로젝트를 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반감이 덜해질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영어사전에 수많은 오류가 있는데, 사전에 나와 있으니 선생님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융통성 없는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어서 사회와 문화, 세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영어 교과서나 참고서나 책자들이 아직도 가끔 100년 전에 사용하던 예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요즘 시중에는 ‘묵찌빠’란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고 또 사전에 오르기도 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영어도 말이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중학생들은 ‘apple―애플―사과’ ‘ant―앤트―개미’라고 적힌 단어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외운다. 이렇게 단어를 외우면 되돌리기가 힘들다. 언어는 잘못 외워 놓으면 제자리로 결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외우지 않느니만 못하다. 영어 단어는 한글과 달리 반드시 단수 또는 복수로 써야 하기 때문에 ‘an apple, the apple, apples’라고 쓰지 ‘apple’이라고만 달랑 쓰는 곳이 없다. apple로 외우느니 an apple로 외워두면 ‘Give me an apple please’가 손쉽게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영어에는 왕도가 없다. 자신감과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며, 주말을 외국인과 함께 보내는 방법도 있겠고, 늘 영어 테이프를 듣고 영화를 많이 보면서 먼저 귀가 열리게 하고 입이 열리게 해야 한다. 언어에는 왕도가 없고 열정만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에릭 함슨(명지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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