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을 가다]戰場의 러 장병들 "옛 榮華를 되찾자"

  • 입력 2000년 5월 25일 19시 59분


체첸 수도 그로즈니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한칼라 기지. 체첸 주둔 러시아군통합사령부가 이곳에 있다. 막사와 벙커들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쉴새없이 뜨고 내리는 헬기와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군용 차량들로 분주했다.

이곳에서 겐나디 트로셰프 장군이 통합사령관으로서 정규군과 내무군 국경경비대 등 체첸에 투입된 15만 병력을 총지휘하고 있다. 그는 체첸전을 주도한 군부 강경파의 대표적 인물.

94년 1차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패전을 거듭한 끝에 철수했지만 이번에는 개전 초부터 체첸군을 남부산악지대로 밀어냈다. 이에 따라 아나톨리 크바쉬닌 참모총장과 트로셰프는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다.

러시아인이면서 그로즈니에서 태어난 트로셰프는 체첸측과의 어떠한 대화도 반대하는 강경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 글로브지의 데이비드 필립 특파원은 트로셰프를 ‘진짜 사나이’지만 ‘미친 놈(mad dog)’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트로셰프는 한칼라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진짜 ‘한칼라의 영웅’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었다. 3월 푸틴이 전폭기를 타고세베르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지켜봤다는 러시아군 대령은 “전폭기가 착륙하자 모두들 경호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조종사 복장을 한 푸틴이 내려 트로셰프조차 놀랐다”고 회상했다.

장교식당에서 만난 다른 대령은 푸틴이 지휘관들과 식사를 할 때 트로셰프가 ‘승리를 위해서’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자 푸틴이 “건배는 승리하고 나서 하자”며 잔을 내려놓아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소개했다. 크렘린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장교들은 이때부터 “푸틴은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것. 3월 대선 때 푸틴을 지지하지 않은 장교는 ‘왕따’를 당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체첸에서 만난 러시아 장교들은 한결같이 봉급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품위유지는커녕 생계유지도 힘들 정도여서 말하기 부끄럽다”는 이유 때문. 이 때문에 엘리트 집단이었던 장교들의 사기는 소련붕괴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이들의 자존심을 다시 살려준 것이 푸틴과 체첸전쟁이었다.

체첸전을 주도한 푸틴은 국민과 군부의 인기를 한꺼번에 얻어 집권했다. 그러나 지금은 계속되는 전쟁과 군부의 지나친 기대가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 푸틴은 군부의 반발없이 전쟁을 마무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매달 1억달러의 전비가 들고 7개월 동안 벌써 2000여명의 전사자를 낸 전쟁을 마냥 끌고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크렘린이나 정부에서는 결국 정치적으로 체첸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의 눈치를 보느라 ‘대화’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한칼라기지에 상주하고 있는 러시아 방송사의 종군특파원의 분석이다.

푸틴에게 체첸사태는 권좌에 오르게 한 결정적 계기였지만 경제회복과 함께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체첸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러시아는 또다시 엄청난 불안과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20일 기자가 체첸을 떠나기 위해 헬기에 오를 때도 후방에서 날아온 Mi26 대형수송헬기가 계속해서 병력과 장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한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저 병사들은 낯선 체첸 땅에서 피를 흘리며 ‘지저분한 전쟁’을 하고 있다. 푸틴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보다 더 중요한 정부의 도덕성 문제다.”

▼汎이슬람과의 싸움▼

체첸전은 러시아와 체첸인만의 전쟁이 아니다. 모스크바특수경찰(OMON) 소속으로 체첸에 파견된 에미르 체르니코지 경사(27)는 체첸 북부지역에서 체첸군과 교전할 때 체첸군에 흑인과 아랍인들이 끼어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러시아군은 약 3000여명의 용병이 체첸군에 가담해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아랍 출신의 이슬람 의용군들이다. 이들은 체첸전이 슬라브정교의 러시아에 맞서 체첸 지역에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싸우는 성전(聖戰)이라고 믿고 있다.

체르니코지는 러시아인이면서 이슬람교도. 그래서 체첸전에 투입될 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모든 용병들이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아니다. 한칼라기지에서 만난 한 러시아군 장교는 “포로 중에는 우크라이나인 라트비아인은 물론 러시아인까지 있다”며 “이들은 순전히 돈 때문에 전쟁에 뛰어든 용병”이라고 말했다.

용병 중에는 여자도 있다. 러시아군은 특히 여자 저격수 때문에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여자 저격수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와 라트비아 출신이다.

러시아군은 용병의 참전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까지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의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과 이고리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은 24일 아프간 내부의 체첸 반군 훈련기지들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동맹국들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이곳에 공습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슬람원리주의 정권인 탈레반과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체첸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의 이슬람단체들은 체첸에 무기구입과 용병고용을 위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한칼라=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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