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紙 천안문사태 10돌특집]『中 혁명보다 진보 선택』

  • 입력 1999년 6월 6일 19시 25분


89년 5월20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톈안(天安)문 광장 근처에 살던 왕페이공(57)은 수만명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모여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느낀 왕은 중국 공산당 당원 자격을 포기하며 학생시위에 동참했다. 그는 시위후 당국의 수배를 받던 학생운동 지도자에게 2백달러를 주며 밀항을 돕기도 했다. 그 결과 당국에 체포돼 27개월간 옥살이를 한 왕은 10년후인 지금 ‘황제와 자객’이라는 시나리오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됐다.

왕시(49). 수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회사의 사장이던 그는 종업원들을 이끌고 톈안문시위에 참여했다. 1년간 투옥된 뒤 풀려난 그는 지난해 수천만달러의 이윤을 남긴 기업의 경영인이 됐다. 그는 이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주주들의 권리”라고 말한다.

톈안문 사태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위어카이시(31)는 지금 대만에서 라디오 토크쇼의 사회자로 활약한다. 그는 언젠가 중국으로 돌아가 TV토크쇼의 사회자가 될 꿈을 꾸고 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톈안문 시위에 가담했던 이들 세 사람의 10년간 삶을 조망하면서 중국이 ‘혁명’보다는 ‘진보’를 선택했다고 5일 보도했다.

비록 수만명의 양심범이 아직도 옥에 갇혀 있고 소수민족인 티베트인과 위구르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는 요원하지만 중국이 민주화를 향해 점진적으로 변화해온 것만은 분명하다고 이 신문은 평가했다.

중국인들은 직업선택 거주이전 해외여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이전 세대가 소지만 해도 체포될 수 있던 ‘불온서적’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것. 심지어 경찰이나 정부 관리들을 공개적으로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톈안문 사태에 가담했던 ‘민주투사’들은 92년 이후 복권돼 사회 각 분야에서 고문근절처럼 작지만 중요한 권리들을 실현시키는데 앞장서왔다. 이에 따라 중국은 소리없이 전체주의적 사회에서 권위주의적 사회로 변모해 왔으며 많은 중국인들은 이처럼 안정된 바탕 위에서 좀더 개방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그러나 톈안문 사태 때 17세 아들을 잃은 인민대학 교수 딩쯔린(62·여)은 “톈안문 사태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면서 “지금의 반민주적 정권으로는 톈안문 희생자들이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딩은 지금도 다른 희생자 가족과 함께 톈안문 사태 당시 중국 지도자들의 발포명령 증거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증거물들을 중국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들 4인의 삶이 21세기를 앞둔 중국의 모순된 자화상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를 예고한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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