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나는 협상자가 아닌 대통령의 특사”라는 페리 조정관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 말은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지시로 북한을 방문해 대북 권고안을 충분히 설명했고 북한의 1차적 반응을 타진한 것으로 만족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때문인지 페리 조정관의 방북결과 설명에는 구체적인 대북 협의내용이나 북한측 입장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정부 관계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수행 중인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은 “지금 방북의 성패를 가름하지 말자”며 “유익하고 심도있는 방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이례적으로 페리 조정관을 따뜻하게 맞았으며 정 관 군의 고위인사들이 줄줄이 페리 조정관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페리 조정관은 비록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는 만나지 못했지만 김위원장과 직접적으로 선(線)이 닿는 ‘실세(實勢)’들과 만남으로써 정확한 북한의 입장을 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폐쇄적인 북한체제의 특성상 김위원장이 페리 조정관을 만나지 않은 정확한 이유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북한이 ‘김정일 면담’ 카드를 좀 더 긴요할 때 쓰기 위해 아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한 페리 조정관의 방북이 50여년간 지속된 한반도 냉전구조를 타파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지도 아직은 장담하기 어렵다.
정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북한이 한미일 3국의 공식입장이라 할 수 있는 대북 권고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북한이 대북 권고안 수용을 선언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시간을 두고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한미일 3국과 북한은 일단 일정기간 자체 검토 및 준비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할 것 같다. 한미일 3국간에는 향후 진행될 대북협상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하는 것도 민감한 현안이다.
〈한기흥·윤영찬기자〉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