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공습]「생지옥서 보낸 코소보청년의 편지」

입력 1999-03-31 19:16수정 2009-09-2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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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는 폭격, 문에서는 노크소리.’ 유고 코소보 주도(州都) 프리슈티나의 한 알바니아계 청년이 발칸반도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 ‘전쟁과 평화 보도 모임(IWPR)’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알바니아계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인종 청소’, 바로 그 알바니아계의 공포 불안 증오를 있는 그대로 쓴 편지다. IWPR 인터넷 사이트(www.iwpr.net)는 이 청년을 보호하기 위해 신원을 감추고 편지 내용만 띄웠다. 편지는 다음과 같다》

지난밤 비행기들이 정말 낮게 날았다. 방공무기가 하늘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거리에는 세르비아계 사람들의 욕지거리. 알바니아 미국 영국 클린턴 블레어 이슬람교도 터키…자기네를 뺀 모두를 저주한다.

밤 10시경. 숨어 있던 건물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집에는 일주일째 못 들어갔다. 옆방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그들이 왔군. 위험이 닥쳤다. 그러나 의외로 침착해졌다. 죽으면 죽는 거지…그렇게 작정하니 편했다.

다시 발소리.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였다. 밖을 내다봤다. 몇주 전 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 세르비아계 청년. 이상한 제복차림이었다. 경찰복도 군복도 아니었다. 동료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와 동료는 총을 든 채 어디론가 갔다. 알바니아인을 죽이거나 집을 태울 것이다.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을의 알바니아인들을 동정했다. 이제는 다르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렸다. 살고 싶다. 평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집은 괜찮을까. 전화도 끊겼다. 잠을 잘 때마다 부모님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슬프다.

어제는 얼마전까지 자주 다니던 카페 앞을 지나쳤다. 부서진 가게 안에서는 경찰 다섯명이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이 지경에 무슨 카페 생각이냐고? 친구들과의 추억 때문이다. 다 어디 갔을까. 언제 다시 만날까. 누구 얼굴을 영영 못볼까. 알 길이 없다.

알바니아계의 집 전화는 모두 끊겼다. 세르비아 경찰과 민병대는 시내 곳곳을 차단하고 있다. 사람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 밖에는. 생각나는 거라곤 길거리에서 본 ‘나쁜 얼굴들’뿐.

수년 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비행기가 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공습이 이처럼 무서울 줄은 몰랐다. 폭격이 무서운 게 아니다. 폭격 후 지상에서 벌어질 학살이 두렵다.

지난밤엔 그래도 행복했다. 주(州)정부 내무부 건물이 폭삭 무너졌다. 창을 통해 본 불길이 흐뭇했다. 그 망할 놈의 건물이 재가 됐다. 부근 아파트 유리창이 박살났지만 상관없다.

오늘밤에는 NATO군 비행기가 더 낮게 날아오면 좋겠다. 친구들은 나를 올빼미라고 했다.밤을 좋아한다며.그러나 이제는 밤이 싫다. 담요를 들고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온 신경을 바깥 소리에 모은다. 비행기 대공화기 자동소총 고함소리…. 총소리는 모두 우리집 쪽에서 나는 것 같다. 누군가를 학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기는 오후 6시면 끊긴다. 촛불을 켜는 건 미련한 짓이다.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는 거니까. 어둠 속에서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리〓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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