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을 극복한 지도자들/「요시다」통치철학]

  • 입력 1997년 12월 6일 20시 48분


요시다 시게루를 평가할 때 「전쟁에는 졌어도 외교에서는 이겼다」는 말이 흔히 인용된다. 그는 외교관 출신답게 부드러운 성품과 인간적인 풍모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참을성있게 설득하며 실리를 취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전후 일본이 부흥하는데 결정적 역할중의 하나는 그의 인사능력이었다. 그가 실무 능력을 갖춘 관료를 중용한 배경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후 당장 국가를 재건하는데는 「능력있는 실무자」들이 필요했고 자신의 허약한 정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들을 발탁 임명했던 것이다. 『정치가란 공부할 여유가 없다. 따라서 정책은 전문가인 관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나중에 총리까지 오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등은 이른바 「요시다 학교」의 우등생으로 그를 이어 일본을 발전 부흥시킨 「후계자」들이었다. 그는 인사와 관련해 임명권을 최대한 활용하고 때로는 절대 권력에 가까운 권한을 휘둘러 「원맨(One Man)재상」「관료체제의 원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도쿄제국대를 나와 1906년 외교관시험에 합격, 일찍이 만주 영사관에서 근무했고 이탈리아 영국 대사를 지낸 그는 「친미친영파」로 분류됐던 인물로 아시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일본 우월관」을 갖고 있었다. 7년 2개월이라는 장기 집권후 총리에서 물러난 뒤 그가 펴낸 「회상 10년」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사정으로 보아 아시아적이라기 보다는 서구적이다. 미국 자금과 일본 기술을 결합해 동남아를 개발하는 게 좋다」고 적었다. 여기에 아시아 지도국으로서의 일본 입장을 견지하려는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도쿄〓윤상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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